이제 재판을 할 수 있는 나머지 기간은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이에 큰아들을 불러 물어보고 판사들이 기록을 읽고 판결문을 작성해야 했다. 새로 바뀐 재판장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다른 판사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한 달 전쯤에 모든 걸 끝내고 시간적 여유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판사가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까지 거의 다 양보를 한 셈이다. 법정 뒷벽에 달려 있는 커다란 쟁반 같은 시계의 바늘이 20분이나 초과한 걸 알려주고 있었다.
“증인이 오지 않고 있는데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재판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판사들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다른 방에서 증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 밖으로 나왔다. 답답했다. 찬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겨울을 가득 담은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법원건물 앞 통행로의 타일바닥에 떨어져 있던 낙엽이 바람을 타고 떠올라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 떨어졌다. 몇 발자국 떨어진 저쪽에서 공판검사가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담배를 빨고 있었다. 법원에는 흡연실이 없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이 벌써 오후 5시를 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죽은 영감의 큰아들은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법부에도 민주화가 많이 진행됐다. 몇 년 전만 해도 판검사들이 증인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기다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사가 형사를 시켜 불법으로라도 잡아오든가 법원의 구인영장이 떨어졌었다. 만약 청부살인 사건이 맞다면 죽은 영감의 아들들은 민주화의 큰 덕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재정권하에는 범인을 만들어서라도 수사를 종결짓곤 했다.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저리를 쳤다. 나는 휴대폰의 폴더를 밀어올리면서 귀에 댔다.
“저 법정에 있는 랭가의 국선변호사입니다. 증인이 안 올 것 같으면 그냥 재판하자는데요. 올라오세요.”
판사들이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법정으로 올라갈게요.”
결국 죽은 영감의 큰아들은 오지 않은 채 재판이 끝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근처에 있는 검사에게 소리쳤다.
“검사님, 재판하러 올라갑시다.”
검사는 찬바람에 얼굴이 새파래져 있었다.
“아직 휴정시간이 남아있는데요.”
공판검사가 시계를 보면서 대답했다.
“지금 올라오랍니다. 재판하자고 그래요.”
옆에 있던 장영목과 나 그리고 공판검사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법정으로 올라갔다. 법원사무관이 업무보조를 하는 직원인 주임과 마주보고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요즈음은 법원사무관이나 주임이나 모두 여성들이 많았다. 여판사도 많았다. 아무래도 재판장이 증인신문 대신 바로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하라고 할 것 같았다. 나는 미리 준비한 변론문을 한 부 법원사무관에게 건네주었다. 법정에서의 말은 아무리 잘해도 공기 중에 날아가 버리곤 했다. 법원의 서기가 그걸 기록에 빠짐없이 잘 써줘야 했다. 조서를 작성할 때 그걸 보면서 하라고 미리 주는 것이다.
“변론이 끝나기 전까지는 원고를 재판장에게 주지 마세요.”
내가 법원사무관에게 부탁했다. 변론을 하는데 그 초안을 미리 재판장이 받아 읽어 버리면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여자 법원사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 하봉식은 끝까지 안 나올 것 같습니까?”
내가 사무관에게 다시 물었다.
“둘째아들을 통해 휴대폰번호를 알아가지고 전화를 했는데 자기는 절대 증언하지 않겠대요. 마음대로 해 보래요.”
법원사무관의 말이었다. 큰아들은 빼째라는 식이었다. 그것도 행동으로 하는 강한 의사표시의 일종이었다.
잠시 후 재판장과 배석판사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재판장이 나를 보면서 물었다.
“하봉식은 법정에 증언하러 오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내가 대답했다. 재판장은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하봉식은 증인신청을 철회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재판장이 연필로 메모를 하면서 말했다. 변호사인 나는 절대로 증인신청을 철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재판절차상 내가 스스로 철회한 것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게 끝이 났다. 더 이상 장영두나 랭가에게 물어볼 수 없고 증인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러면 검사, 구형을 하시죠.”
“피고인들에게 각 무기징역을 구형합니다.”
간단한 구형이었다. 무기징역의 의미는 치밀한 청부살인이니까 최고의 징역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변론하시죠.”
재판장이 이번에는 나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변론에서 공제법을 쓰기로 했다. 우발적인 살인을 주장하기보다 청부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조목조목 증거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강도가 아니라는 걸 주장하면 자연히 우발적인 살인만 남고 그렇게 낙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세를 바로 잡고 막 변론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앞에 있던 업무보조 직원인 주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변론문을 살짝 재판장 앞에 올려놓았다.
“어? 내가 변론이 끝날 때까지는 초안을 올리지 말아 달라고 조금 전에 부탁했었는데….”
내가 주임을 보고 항의했다. 법원사무관이 조금 전 기억을 떠올리면서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재판장이 내 말을 듣고 씩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변론 끝날 때까지 이거 보지 않을게요.”
재판장이 내 변론문을 다시 주임에게 내려 주었다. 소박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법정에서 재판장은 절대권력자였다. 권력을 가진 자는 교만하기보다 겸손하기가 몇 백배 더 힘든 것이다. 내가 변론을 시작했다. 이 사건의 총체적인 요약이었다.
“장영두와 랭가는 하두만 영감을 살해한 걸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장영두는 뿐만 아니라 스스로 경찰에 자수까지 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본 변호인은 이 살인사건의 동기가 과연 청부살인인지 또는 강도인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살인의 경우도 수많은 종류가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잔혹하게 죽인 존속살인도 있고 운전 실수로 사람을 죽인 과실치사도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킬러같이 직업적인 청부살인도 있고 싸우는 도중에 상대방이 죽어버린 폭행치사도 있었다. 그 형량도 사형부터 집행유예까지 극에서 극이다. 살인이라고 다 같은 살인이 아니다. 동기에 따라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해질 수도 있고 석방되는 경우도 있었다. 무기징역을 구형한 의미는 청부살인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계속했다.
“일심에서 장영두에게 선고된 징역 15년은 청부살인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지금 검사는 장영두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위장 자수하고 배경에 대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장영두를 철저히 법이 응징해 달라는 사상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검사의 구형량에는 법조인들만 아는 여러 가지 숨은 암호가 들어있었다. 이를 테면 징역 1년 구형은 용서해 달라는 검사의 신호였다. 3년 이하의 구형에는 법원이 풀어줘도 이의가 없다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내가 계속했다.
“청부살인의 유일한 결정적인 증거는 랭가의 자백 하나입니다. 2억 원을 받기로 하고 하 영감을 죽여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랭가가 과연 그런 거액을 받고 살인하는 킬러의 특징이 조금이라도 있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청부살인이라면 랭가는 잡히지 말았어야 합니다. 영감을 살해하고 그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랭가로서는 그 시간이면 비행기 표를 사서 이미 방글라데시뿐 아니라 지구 어디라도 가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랭가는 도망을 하지 않았을까요? 킬러로서는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우매한 행동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나는 살인청부의 계약금 문제를 언급했다.
“킬러라고 하는 랭가는 청부살인과 관련해서 먼저 계약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윤리도 도덕도 믿음도 없는 범죄세계에서 상대방을 믿고 먼저 일부터 해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이어서 나는 화제의 대상을 장영두 쪽으로 돌렸다.
“장영두가 자수를 한 이후 우발적인 단독범임을 주장했다면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판결도 과실치사를 벗어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상식만 있어도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장영두가 랭가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면 방글라데시인 불법체류자인 그는 수사선상에 절대로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영두는 랭가가 공범이라고 형사들에게 말했고 데리고 간 형사들에 의해 랭가는 3월 19일 아침 6시에 집에서 체포됐습니다. 왜 체포되게 했을까요?”
살인의 공범들이 같이 체포될 때는 꼭 이유가 있었다. 동시에 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본 변호인은 청부살인 사건을 맡아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살인청부를 받은 공범들은 체포됐을 때를 가상해서 말을 맞추기 위해 사전에 치밀한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연습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일반의 우발범들과 다른 프로의 기본적인 차이점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시나리오 첫 단계로 그들이 진짜 살인범은 따로 있다고 하면서 수사에 혼선을 주는 걸 봤습니다. 다음단계는 살인의 동기를 우발적으로 만들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될 때 마지막에 가서는 절도나 다른 사유를 잡는 게 그들의 계략의 기본구조입니다.”
살인범들은 많아도 행동패턴은 몇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방글라데시인 랭가는 잡히자마자 2억 원을 받기로 한 청부살인이라고 자백했습니다. 장영두의 우발적 살인이라는 진술과는 백팔십도 다른 서로 배치되는 진술이었습니다. 청부살인의 공범의 특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어떤 이유로 단번에 극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청부살인을 랭가가 자백했을까요? 랭가는 죽고 싶었을까요?”
내가 말하는 속에는 바보같이 겁먹는 외국인 범죄자를 회유해서 사건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강한 의혹이 들어 있었다.
“랭가는 특권같이 바로 한국의 방송기자들과 인터뷰하는 게 허락됐습니다. 허락이라기보다는 경찰에 의해 인터뷰가 강행되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랭가의 청부살인이라는 말이 기정사실화되어 버렸습니다. 고립무원의 외국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랭가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청부살인의 허구성에 대한 부분은 대강 말이 끝났다. 나는 다음으로 강도살인범이 아니라는 주장 쪽으로 변론의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