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폭행 의혹을 받고 있는 JMS 교주 정명석 씨가 수많은 ‘보고자’들과 함께 살던 80년대 서울 평창동 본부. | ||
신도 수가 급증하던 80년대 당시 정명석 씨가 거주하던 곳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44X~45X번지 일대. 정 씨는 이곳의 몇몇 주택에 거주하며 보고자들과 단체로 생활했고 JMS 내부에선 이 집을 ‘본부’로 불렀다. 정 씨가 언제부터 평창동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평창동 본부 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정 씨가 이미 80년대 초부터 평창동에 둥지를 틀고 젊은 여성 보고자들을 대거 포섭해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넓혀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검증된 ‘열혈’ 보고자들만 집단 거주하던 평창동 본부는 JMS의 세력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그 실체는 그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전 JMS 신도들 중 상당수는 정 씨가 평창동 본부를 거점으로 삼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재림주’로 추앙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또 정 씨에게 ‘간택’된 수많은 젊은 미모의 보고자들이 ‘평창동 안방’에서 갖가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도대체 정 씨의 ‘평창동 아지트’는 어떤 곳이었을까. 또 그곳에 모인 여성 보고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때 JMS에 깊숙이 몸담았던 이들의 증언을 통해 정 씨의 국내 거처였던 평창동 아지트의 실체를 파헤쳤다.
현재 교직에 몸담고 있는 A 씨(남)는 대학교 때 JMS에 전도되어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10여 년 동안 열성적으로 JMS교단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A 씨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경험을 토대로 이른바 ‘평창동 본부’의 실체에 대해 어렵사리 털어놓았다.
JMS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 따르면 과거 정 씨는 평창동에서 몇 번 거처를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A 씨 역시 “내가 활동할 당시에도 정 씨는 집을 두 번 옮겼다. 첫 번째 집은 5000만 원짜리 전셋집이었는데 정원을 워낙 잘 꾸며 놓아서 나갈 때 집주인으로부터 웃돈을 받았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평창동 본부’의 가장 큰 특징은 정 씨에 대한 절대복종과 우상화, 외부와 단절된 폐쇄성으로 요약된다. A 씨는 “평창동 생활은 오직 정명석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으로 사실상 밀실생활이나 다름없었다”고 회상한다. 전 신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창동 본부는 워낙 경호가 삼엄해 아무나 출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비밀스럽게 진행되어 이웃에서도 그 실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평창동 본부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A 씨는 “‘남자’라는 이유로 정 씨의 방에는 거의 들어가지도 못하고 정원에서 기도하거나 거실에 꿇어앉아 있다가 오는 일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거실에 걸린 정 씨의 대형사진을 보거나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다”고 떠올렸다.
첫 번째 집(사진)은 2층이 바로 대문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는데 거실을 지나 나무계단을 내려가면 1층에 정 씨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또 두 번째 집은 정 씨가 보고자의 명의로 사들인 것으로 첫 번째 집과 달리 2층에 정 씨의 방이 있었으며 차 없이는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을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본부 생활’ 경험자들은 평창동 본부에서는 정 씨의 말 한마디에 따라 모든 내부시스템이 좌지우지되곤 했다고 입을 모은다. 정 씨는 항시 운전기사를 포함해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는데 집 안에서도 항시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 씨는 정원을 꾸미는 데 유독 공을 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작은 수영장까지 갖춘 정원은 온갖 아름다운 조경물과 꽃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마치 ‘천국’에 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는 것이다. 정원에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정 씨가 직접 만들었다는 돌탑도 있었는데 거짓이 탄로날 것이 두려웠던지 신앙이 좋지 않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무너진다는 식으로 ‘황당하게’ 겁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경험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평창동에서 기거하는 보고자들은 정 씨를 신격화·우상화하는 것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A 씨는 “정 씨가 탁구를 친 후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혀주는 보고자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목욕 시에도 보고자들이 머리에 비누칠을 해주고 온몸을 씻겨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신마사지까지 해줬다. 마치 수많은 후궁에 둘러싸인 왕과 같았던 셈이다. 보고자들 사이에서 정 씨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재림주로 여겨졌는데 정 씨 스스로도 야채를 생으로 즐기고 멸치나 김 같은 자연 건강식 위주로 먹는 등 매우 까다롭게 건강을 챙겼던 걸로 기억된다”고 전했다.
▲ 정명석 | ||
“여성 보고자들이 머무는 방 문에는 정 씨가 직접 그린 가위그림을 붙여놓는 것으로 남성들의 출입을 막았다. 정 씨가 그린 그림 하나까지도 절대적인 위력을 갖는 것으로 추앙되고 있었던 것이다. 평창동 본부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정 씨는 보고자들 앞에서 5000원권 지폐에 있는 율곡의 초상화를 연필로 그려보이기도 했는데 초등학생 수준임에도 보고자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치켜세우곤 했다. 또 커트를 못해 직구로만 탁구를 하는 정 씨를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경기에서 이긴 정 씨는 아이처럼 크게 웃으며 좋아하곤 했다. 당시에는 이것이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평창동 본부에서 기거하던 여성 보고자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평창동 시절을 겪었던 상당수 사람들은 여성 보고자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전 JMS 신도 B 씨는 “본부에는 항상 각 지방에서 온 젊은 여성 보고자로 넘쳐났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그들은 눈에 확 띌 정도의 미모였는데 운동기구를 타거나 소파에 앉아서 정 씨를 기다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 여성 보고자들은 개별적으로 정 씨를 만나 어떤 사안을 보고하기도 하지만 은밀한 관계가 당시에도 이미 암묵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이들 경험자들의 증언이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났다는 정 씨의 방은 어땠을까. 대학교 때부터 갖가지 ‘앵벌이’를 하면서 JMS 측에 수시로 돈을 바쳤다는 A 씨는 취직 후에도 월급의 대부분을 바치는 ‘충성’을 한 덕분에 JMS 전도사가 전도한 ‘미스○○’ 출신의 여성과 함께 정 씨의 방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A 씨의 얘기.
“방안에는 침대와 장롱 등 간단한 가구들이 있었는데 사람 얼굴이 은은하게 보이는 정도의 전구 한 개를 켜놓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 씨는 얇은 이불을 좋아했는데 바닥에도 이불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 씨의 옷차림은 거의 츄리닝 차림이었다. 기도를 받은 후 나와 전도사는 나오고 미스○○만 방에 남았다. 그녀는 약 한 시간 후에 방에서 나왔는데 우리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 씨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 것투성이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들이 그곳에서 수도 없이 벌어졌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창동 본부에는 항시 여성 보고자들로 북적댔으며 정 씨의 ‘부름’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A 씨는 “오죽하면 정 씨를 따라다니는 여성 보고자 전용 미니버스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는데 정 씨의 벤츠에는 정 씨의 여인 이○○와 그의 언니 이△△가 주로 같이 타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평창동 본부에 머물던 보고자들의 생활은 천차만별이었다고 한다. 정 씨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느냐에 따라 보고자들의 생활의 질이 결정됐다는 것.
90년대 초 서울대 신입생 시절 JMS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한 엘리트 여성은 4년간의 대학생활 동안 평창동 본부에 불려다니며 정 씨의 성노리개이자 보고자로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 수년간 보고자로 살았던 또 다른 여성이 털어놓은 얘기 역시 당시 평창동 보고자들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평창동에 살았던 우리들의 유일한 관심은 ‘선생님’의 총애를 얼마나 많이 받느냐였다. 여자가 봐도 질투가 날 만큼 멋진 외모를 지닌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정 씨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안절부절했었다. 보고자들끼리 하는 얘기들도 ‘선생님이 사랑해주셨어?’ ‘선생님 너무 멋있지?’ ‘용돈은 얼마나 주시든?’ ‘이 일은 하늘과 애인들끼리만 아는 비밀이야’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얘기는 발설하면 안돼’ 이런 식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선생님께 간택된 ‘축복받은’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남는 공간이 없어서 옷방에서 잠을 자도 ‘메시아 옷방’에서 잔다는 이유로 기세등등하던 이들도 있었다.”
▲ JMS 체육대회 당시 정명석 씨가 여성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 ||
JMS 전 신도들에 따르면 평창동 보고자들 간에도 적잖은 알력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고자 생활을 했다는 한 여성은 “젊은 보고자들이 늘어나면서 20대 후반의 보고자들은 정 씨의 지시에 따라 인근에 따로 모여 살았는데 이들의 소원은 정 씨와 한집에 사는 것이었다. 이들은 본부(정 씨의 집)에 사는 보고자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밀려났다’는 자격지심에 힘들어하기도 했는데 정 씨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들의 집단숙소를 ‘파견본부’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본부의 보고자들은 나가서 사는 보고자들을 깔보며 무시했고, ‘파견본부’에 사는 보고자들은 ‘한집에서 안 살 뿐이지 우리도 본부는 본부’라고 하며 미묘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렇다면 평창동 본부에 이처럼 젊고 아리따운 여성 보고자들이 넘쳐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A 씨는 “내가 활동하던 시기에 JMS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목회자들 중 상당수는 정 씨에게 젊은 여성을 바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정 씨에게 간택되기 위해 평창동 본부에 모여들었는지는 이 같은 A 씨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JMS 교회의 상당수 목회자들은 미모의 보고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그리고 많이 전도해서 정 씨에게 연결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때문에 마수에 걸려든 미스○○ 같은 공인된 ‘월척’들이 전국에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정 씨는 마음에 드는 여성이 오면 몇 시간이고 기다리던 사람을 제쳐두고 우선 ‘면담’을 했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면담’은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가 몇 천만 원짜리라고 자랑을 하거나 자신을 재림주로 소개하면서 성추행 혹은 성관계가 이뤄지는 식이었다.”
그러나 JMS 측의 한 관계자는 이 같은 전 신도들의 증언과 주장에 대해 “이탈자들의 음해일 뿐”이라며 “신도들 대부분이 대졸 학력 이상자로 지성과 학식을 지닌 이들인데 과연 정 총재가 그처럼 문란하고 우스꽝스러운 생활을 했다면 그를 믿고 따랐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국내에 있는 정 씨의 추종자들은 아직도 정 씨가 국내외에서 갖가지 혐의를 받는 것은 모함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에서 체포된 정 씨는 현지의 실정법에 따라 사법절차를 밟게 될 것으로 예상돼 실제 국내로 송환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정 씨의 숨겨진 과거 행적과 범죄 혐의를 둘러싼 논란은 상당 기간 이어지겠지만 정 씨가 이번만큼은 법의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법조계 주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