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와서 이 자리에 앉으세요.”
여주임은 엉거주춤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인 통역을 안내했다.
통역이 조심스럽게 법대 쪽으로 올라와 배치된 자리에 앉았다. 이제 주인공인 재판장이 나타날 수 있게 준비가 완료됐다. 이윽고 재판장이 배석판사들을 이끌고 기다란 법복에 바람을 일으키며 무대에 나타났다. 재판장이 잠시 장영두와 랭가를 둘러보았다. 재판장은 그 순간 이 세상에서 장영두의 삶을 박탈할 수도 있고 살려줄 수도 있는 절대권한을 가진 신적 존재였다. 재판장은 감정을 숨긴 얼굴로 판결이유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장영두는 외국인 랭가에게 여러 차례 돈 많은 할아버지가 있는데 자식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을 해주고는 그 할아버지를 죽여주면 자식들이 돈을 주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랭가에게 그 자신이 죽은 영감의 아들과 친구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랭가에게 선금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합니다. 피고인 장영두는 영감을 죽인 후 아들한테 돈을 받아서 준다는 거짓말을 만들어 한 것이라고 재판부는 보고 있습니다. 랭가로서는 장영두의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재판부는 청부살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청부살인이라는 거짓말을 장영두가 만들어 낸 것으로 결론지었다. 두 번째는 강도였다. 재판장은 그 점에 대해서 법원이 내린 결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장영두가 피해자를 살해한 후 과수원을 명의이전하여 매도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범행의 동기 부분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재판장은 어디로 궤도를 수정할지 모를 그런 어조였다.
“그렇지만 살인의 동기는 장영두의 내심의 의사기 때문에 그 진술에 의해 파악할 수밖에 없고 불합리한 동기로도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히 범행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강도라는 얘기 같았다. 그렇다면 법원은 장영두가 말한 우발적인 살인이란 주장에 대해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에 대한 판결의 논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영두는 이 사건을 랭가의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랭가는 범행 당일 아무런 원한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피해자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깜둥이새끼라는 한마디 정도로 사람을 죽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입니다.”
비논리적인 강도의 동기는 있을 수 있고 우발적인 살인의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었다. 강도로 결론을 짓고 그 근거논리를 만든 느낌이 들었다. 재판장은 계속했다.
“랭가는 살인청부를 받아 죽였다는 것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보다 훨씬 불리한데도 계속 자기에게 불리한 그런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랭가의 말이 장영두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랭가가 그렇게 말하는 진짜 이유에 재판장의 생각은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설명은 계속됐다.
“장영두는 피해자의 집에 찾아갈 때 범행에 사용하는 외에는 다른 용도가 없어 보이는 비닐봉지와 테이프를 가지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장영두는 죽은 영감의 머리통을 발로 두 번 찼습니다.”
재판장이 거기서 잠시 호흡을 끊었다. 판결이유가 서서히 결론부분에 이르고 있었다. 재판장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변호인이 말한 그런 점들이 없지는 않지만 장영두의 말은 수시로 바뀌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랭가의 변함없는 일관된 진술 그리고 그 말들 속에 모순되거나 객관적인 사정에 반하는 게 없는 점들을 고려할 때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 범행의 동기, 수단과 방법, 내용, 결과, 범행 후의 정황, 피고인들의 연령, 성향등 이 사건에 나타난 형법 제51조의 양형조건을 종합해 보면 원심이 피고인들에게 선고한 형은 적정하고 너무 무겁거나 가벼워서 부당하다고 인정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피고인들의 항소와 검사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기로 합니다.”
장영두에게 징역 15년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검사는 청부살인범으로 무기징역을 주장했다. 검사로서의 권한과 역할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강도나 청부살인을 부인하고 정상참작을 해서 짧은 징역형을 장영두가 살았으면 희망했다. 판사는 청부살인은 아니지만 장영두가 거짓말을 했고 그 말을 믿은 랭가가 사람을 죽이게 했으니까 징역 15년쯤 살아도 된다는 결론이었다. 정확한 범죄동기는 모르겠지만 강도 같기도 하다는 법원의 판단이었다.
선고가 끝난 후 법원 정문 앞에서 장영목이 내게 말했다.
“항소심에서 실패했어도 저는 절대로 변호사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며칠 후 강한 첫추위가 들이닥친 날 나는 서울구치소로 이감을 간 장영두를 찾아갔다. 그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접견실로 덜레덜레 나왔다. 벌써 1년이 다가오는 감옥살이에 그의 볼은 움푹 파였다. 영양부족인 것 같았다. 볼에 수염이 거뭇거뭇 나 있었다. 처음 볼 때 밝고 농담도 하던 얼굴이 이제는 검은 구름이 낀 것 같이 어두웠다. 장영두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재판장님이 나를 강도라는 건 말도 안 돼요. 우리 형님보고 도시계획확인원을 떼서 판사님에게 전해 드리라고 했어요. 어떤 부동산사무실에서 나 같은 놈 보고 100억이 넘는 영감님 땅을 사려고 하겠어요? 그 필지가 다 하나로 묶여 있거든요. 그거 말도 안 되는데 왜 나보고 강도라고 하죠? 나 강도 아닌데….”
그의 얼굴에 원망이 가득했다. 그는 항상 한 박자 늦었다. 선고하는 법정에서 그는 너무 태연한 얼굴이었다. 내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장영두 씨는 동화 ‘늑대와 소년’에 나오는 주인공이 돼 버린 것 같아요.”
거짓말을 거듭 한 소년에게 진짜 생명의 위협이 다가와도 사람들은 더 이상 믿지 않았다. 판결이유의 행간에 숨어 있는 장영두가 처벌을 받는 진짜 이유는 그의 흐리멍덩한 농담과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죽여줄 수 있느냐는 그의 말이 자신에게는 용서받을 수 있는 실없는 농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인의 결과 앞에서 결코 그것은 단순할 수만은 없었다. 앞에 있던 장영두의 불만이 뒤늦게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말을 못하니까 재판부가 나를 아주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아요. 도대체 가능성만 가지고 재판하는 게 어디 있어요? 제가 과수원 땅을 팔아먹으려고 강도했다는 재판장 말을 들으면서 정말 기가 막혔어요. 내가 땅 팔아먹으려고 영감 죽였다는 거 말도 안 돼요. 제가 영감님을 모시면서 부동산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니까요. 영감님이 사위하고 소송을 할 때도 옆에서 모시고 다녔죠. 부동산사무실에서 얼굴 확인을 다 하고 주민등록증도 보자고 해요. 사는 사람도 땅임자를 확인하고요. 내가 도대체 어떻게 땅을 팔아먹을 수 있겠어요? 판사가 도시계획확인원 하나만 떼 봐도 다 알 텐데….”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그가 강도를 하려고 한 것 같지 않았다. 그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강도살인범이 아니라는 건 꿈에 죽은 영감님이 나타나지 않는 것만 봐도 분명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물었다.
“지금 제가 있는 감방에 살인범만 여섯 명이 생활하고 있어요. 밤에 잠잘 때 보면 교대로 ‘으으으’ 하고 가위눌리는 소리도 하고 ‘으악’ 하고 놀라서 벌떡 일어나요. 죽은 사람들이 귀신이 되서 꿈속에 찾아와서 목을 조르고 그러나 봐요. 그런데 나한테는 죽은 그 영감님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요. 감옥 안에서 랭가를 만났는데 랭가한테는 매일 같이 그 영감님이 인상을 쓰고 나타나서 괴롭힌대요. 내가 너무 잠을 편히 자는 게 다른 살인범한테는 미안해 죽겠어요. 감방 살인범 동료들이 나보고 ‘너 살인범 맞아?’라고 물어보기도 해요.”
장영두의 머릿속에 살인의 추억은 더 이상 없었다. 그가 측은해졌다.
“도대체 앞으로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교도소에서 살려고 그래요?”
내가 답답해서 물었다. 마흔 살 총각인 그는 환갑 가까이 돼서나 석방될 것이다.
“나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되겠죠, 뭐.”
그가 또 남의 얘기 같은 투로 내뱉었다.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내게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검찰이 요구한다고 장영두 씨가 아들이 살인을 부탁했다고 또 거짓말 한마디만 했으면 생사람 잡았을지도 몰라.”
내가 휘청거리는 장영두의 진술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사실 그랬다. 장영두가 적당히 아들 중 한 명을 찍었으면 검찰은 청부살인으로 확신을 가지고 몰아갔을 것이다.
“검사님은 처음에 내가 아들한테 다른 데 땅이라도 몰래 받은 줄 알고 대라고 했지요. 하도 대라고 하는 통에 적당히 말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사람 잡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아니라고 했죠. 아니니까 아니라고 한 거죠. 지금 생각해 보니까 형사나 검사가 묻는 말에 너무 생각 없이 넙죽넙죽 대답했어요. 내가 무지한 놈이었죠.”
“랭가는 만나봤어요?”
“만나봤어요. 선고가 나니까 그제야 뭔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았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기는 ‘쉽게 죽였는데 왜 이렇게 형을 많이 줘?’하고 울고 소리쳤어요.”
“쉽게 죽이다니 그게 무슨 뜻인데요?”
내가 물었다.
“우발적으로 죽였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나한테 돈이 안 나오는 이유를 확실히 안 거죠. 얼굴 표정을 보니 무지하게 후회하는 거예요. 미안한지 날 외면하더라고요.”
그렇게 재판은 끝이 났다. 다시 연일 사건이 터지고 장영두는 음습한 교도소 안 깊숙이 들어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끝)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