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를 기록했던 관료들이 연애나 성에 관한 것은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 했기 때문에 이에 관한 기록이 오늘날 많이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이라고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남녀상열지사’가 없었을 리 만무. 지난해 조선시대의 엽기사건들을 파헤친 책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으로 화제를 낳았던 소설가 이수광 씨가 이번에는 조선시대의 갖가지 연애 비화를 책으로 펴냈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다산초당)이 바로 그것.
이 씨는 <대동기문>, <동야휘집> 등의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의 은밀한 사랑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재구성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양반 규수와 노비의 혼례, 궁궐에서의 동성애, 아버지의 첩을 겁탈한 아들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화들과 함께 이들 사건에 투영된 사회상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왕위 버리고 사랑 선택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 하지만 그는 왕위를 이을 적자는 아니었다. 본래 임금의 자리에 올라야 할 이는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 이제였다. 일반적으로는 동생인 충녕이 총명해 형인 양녕이 왕위를 양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양녕과 충녕은 왕위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양녕이 충녕에게 밀리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어리’라는 한 사대부가의 첩이었다.
당시 양녕은 세자로서 한양을 다스리고 있었다. 아버지인 태종은 개성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양의 실질적인 주인은 양녕이었던 것. 너무 일찍 권력의 달콤함을 알아버린 것일까. 양녕은 수하를 거느린 채 궐 밖으로 나와 기생집에 출입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날도 어김없이 양녕은 궐 밖에서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양녕은 우연히 한 여인을 발견하고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 여인이 곽선이라는 사대부의 첩인 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양녕은 어리에게 수낭(수를 놓은 예쁜 비단 주머니)을 선물로 보냈다. 그후 사람을 보내 어리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어리는 “나는 남편에게 절개를 지키려 한다”며 거절했다. 이에 양녕은 직접 어리의 집으로 찾아와 수청 들기를 요구했다. 몇 번이나 거절당한 끝에 양녕은 결국 어리를 취할 수 있었다. 어리도 혈기왕성하고 최고의 권세를 가진 세자에게 곧 빠져들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밤낮없이 벌어지는 양녕과 어리의 질퍽한 사랑놀음은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격노한 태종은 세자인 양녕을 개성으로 불러 엄중히 질책한 후 이와는 별도로 세자 폐위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세자의 우호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태종은 양녕을 용서하기로 하고 어리는 사형시키려 했으나 양녕의 간곡한 청으로 어리를 대궐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양녕은 어리를 단념하지 않았고 어리를 사가의 여종으로 위장시켜 대궐로 불러들여 다시 사랑을 나눴다. 그러던 중에 어리가 잉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실 역시 얼마 가지 않아 태종의 귀로 들어갔다. 양녕은 개성으로 가 태종을 알현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미 태종의 마음이 자신으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알고는 태종에게 자신이 정당하다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올렸다. 또 어리를 궐에서 내보내라는 태종의 영을 거절했다. 이 서신으로 태종은 대노하여 세자를 폐하기로 결정하고 셋째아들인 충녕을 세자로 삼았다. 결국 양녕은 왕세자라는 절대권력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리를 버리고 어리와의 사랑을 택한 것이다.
#구중궁궐 은밀한 동성애
세종의 장자로서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이향은 두 차례나 세종에 의해 부인이 폐출되었는데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바로 동성애 사건으로 대궐을 발칵 뒤집어놓은 봉 씨였다.
세자와 봉 씨는 처음부터 부부금실이 좋지 못했다. 아버지인 세종이 “비록 부모일지라도 침실의 일까지야 어찌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둘 사이에는 후사가 없어서 관계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이를 본 세종은 대를 잇지 못할까 걱정되는 마음에 세 명의 승휘(세자의 후궁)를 뽑아 동궁에 거처하게 했다. 이 가운데 한 명이 단종의 어머니인 권 승휘다. 세자는 봉 씨보다 승휘들을 더 총애했고 이 때문에 봉 씨는 세자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이 가슴에 쌓였다.
꽃다운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오로지 한 명의 남자만 바라봐야만 하는 궁중 여인들의 운명은 보통 여자가 감당하기엔 쉽지 않은 것이였다. 봉 씨 역시 철창 속에 갇힌 자신의 신세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탈출구를 찾다 동성애에 빠진 것이다.
#일부종사 거부한 규수
“나는 창기요”라고 스스로를 칭한 여자가 조선시대에 둘이나 있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것도 사대부가(家) 출신의 규수가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유감동과 어을우동이라는 여인들은 자신들을 창기라 칭하면서 많은 남성들과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겼다.
무안 현감 최중기의 부인이었던 유감동은 무뢰배 김여달로부터 겁탈을 당했다. 당시 남편과의 사이에 아무런 정을 느낄 수 없었던 유감동은 치욕스러웠으나 점점 김여달이 보고 싶다는 기이한 욕망이 일었고 결국 그들은 위험한 밀애를 시작했다.
일단 욕망에 불이 붙은 유감동은 김여달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어차피 발각되면 죽을 목숨인데 무엇이 두려우랴’라는 생각으로 세상의 모든 남자들과 자유로운 사랑을 나누기로 결심했다. 사대부가의 부인이라고 하면 남자들이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에 유감동은 창기로 행세하면서 수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렸다. 결국 유감동의 음행은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조사 결과 유감동은 영의정에서부터 천민인 공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통간한 것으로 드러나 조정을 발칵 뒤집어놨다. 유감동과 정을 통했던 관료들은 곤장을 맞았고 유감동은 먼 변방으로 유배를 당했다.
어을우동 역시 사대부가에서 태어나 왕실의 인척인 태강 현감 이동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어을우동은 공부와 일에만 집중하는 남편을 보며 외로움을 참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집으로 일을 하러온 사내와 농을 주고받다가 발각돼 집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후 어을우동은 본격적인 엽색 행각에 나선다. 어을우동은 유감동과 달리 자신이 남자를 물색하며 직접 상대방을 골랐다. 어을우동이 여러 남자와 간음한다는 소문은 장안에 퍼졌고 끝내 사헌부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은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또 어을우동과 음행을 벌였던 수많은 사대부들은 파직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야만 했다.
엄격한 내외가 있던 조선시대에 수많은 남성과 사랑을 나눴던 이들은 과연 욕망에 굶주린 요부일까, 아니면 인습을 타파하고 본능과 정체성을 찾으려 한 자유부인일까.
#신분 초월한 로맨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조선시대에도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불릴 만한 로맨스가 있었는데 가이와 부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다른 사람끼리는 혼인을 할 수 없었다. 단 남자는 어느 정도 융통성이 허용됐으나 여자는 그 제한이 엄격했다. 양반집 딸인 가이와 그 집의 종이었던 부금은 애초에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 하지만 점점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언제까지나 억제할 수는 없는 노릇. 그들은 결국 열렬하게 사랑을 나눴고 나라에서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양반집 규수와 노비 간에 혼례를 올렸다.
전에 없는 양반과 사노 간의 결혼에 경북 청송 일대는 술렁거렸다. 하지만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아서 가이와 부금의 행복하지만 불안한 부부생활은 1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지된 사랑’에 빠진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 양반이 이들의 혼례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관아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놨다. 즉시 수사가 이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전모는 밝혀졌다. 세종은 부금에게는 참수형을 내렸고 가이는 측은하게 여겨 1등(급)을 내린 교수형을 명했다. 판결 후 그들은 옥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가이는 부금에게 “죽어서도 우리는 같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변치 않는 애정을 보였다. 실제로 가이는 먼저 형을 당한 부금을 팔공산 자락에 묻고 자신도 교수형을 받은 뒤 그 옆에 묻혔다. 두 연인은 죽어서야 비로소 나란히 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사방지 출현에 발칵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시대에 사방지란 인물이 무려 열네 번이나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인물이기에 한 임금 재위 시에 이렇게 빈번하게 이름을 올렸나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방지는 다름 아닌 양성, 즉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오늘날에는 변형된 성 염색체 등을 거론하며 얼마든지 양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러한 양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생겨난 ‘괴인’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사방지는 어릴 때부터 용모가 남달랐다. 마치 계집애처럼 살결이 곱고 입술이 붉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조차 가늘어서 또래의 사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이를 본 사방지의 어미가 그를 계집애처럼 치장을 해줬는데 이것이 바로 사방지가 여장을 한 시초였다.
그 후 사방지는 계속 여장을 하며 지냈는데 제일 먼저 정을 통한 인물이 내시 김연의 처였다. 사방지가 여자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김연의 처는 사방지를 자신의 옆에서 자도록 했는데 사방지는 김연의 처가 잠들자 간음해 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여러 해를 김연의 처와 같이 살다가 그 집을 나온 사방지는 한 암자에 머물면서 여승인 중비와 그곳에 거주하던 소녀들을 간음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대부가인 김구석의 처 이 씨와도 동침하면서 정을 통했다.
사방지가 행적이 괴이하다는 제보를 받은 사헌부가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사헌부로 잡혀온 사방지는 영락없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조는 사방지의 몸을 수색하게 했는데 그 결과 사방지가 남자와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진 인물임을 알게 됐다. 사방지가 양성임이 드러나자 장안은 떠들썩했다. 사헌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관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아 외쳤지만 세조는 사방지가 단지 ‘병자’일 뿐이라며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먼 지방으로 보내 노비로 삼았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