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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주인공인 여성이 남장을 하는 모습. | ||
하지만 박 씨는 ‘특별한’ 남자다. 30년 동안 여자의 몸으로 살아오다 2년 전 성전환 수술을 통해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트랜스젠더인 것. 연예인 하리수 등을 통해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한 경우(MTF:Male To Female)는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여자에서 남자로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경우(FTM:Female To Male)는 아직 낯설다.
여자로 태어나 남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성적 소수자인 이들이 숙명처럼 짊어지는 여성 그리고 남성으로서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박 씨의 얘기 등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FTM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박 씨에게 첫 질문으로 ‘수술을 해서 ‘남자’가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였냐’고 물어봤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서서 볼일 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웃음을 겨우 참았는데 그가 오히려 박장대소한다. 우스개처럼 들렸지만 사실 그의 대답엔 FTM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박 씨는 “우습지 않나? 그런데 수술하기 전에는 앉아서 볼일 보는 것이 정말 수치스러웠다”고 말했다.
“전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던 얘기가 있어요. 어머니가 저에게 치마를 입히려고 하는데 제가 그렇게 입기 싫어했대요. 그래서 억지로 입혀서 유치원엘 보냈는데 제가 유치원에 가지도 않고 집 앞에 앉아 있더래요. 그래서 왜 안 가냐고 물어봤더니 제가 ‘치마 입고 어떻게 가’라고 말했대요. 아마 어린 마음에도 본능적으로 남성을 지향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는 본격적으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입학식이 열린 운동장에서 남자와 여자를 가른 줄 중 어느 곳에 서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여자 쪽에 줄을 서긴 섰는데 이상하게 남자 쪽에 서고 싶은 기분이 들더라.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상한 줄 몰랐는데 어린 마음에도 ‘내가 비정상인가’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라고 말했다.
성장하면서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커져만 갔다. 특히 2차 성징의 징후가 나타나면서 그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중학교 1학년 때인가부터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솔직히 저는 제가 남자로 성장할 줄 알았어요. 그때의 충격이란 정말….”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쉰 후 말을 이었다. “그후부터 가슴에 압박붕대를 하기 시작했죠. 화장실도 절대 학교에서 가지 않았어요. 물론 제가 여자화장실에 가고 가슴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제 스스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학교에 다니는 동안 다른 애로사항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박 씨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체육시간에 여자애들 사이에서 피구를 하거나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의 응원을 할 때는 정말 몸이 근질거리기도 하고 왜 나는 저기서 뛰지 못하나 억울하기도 했죠. 또 여름에 남자애들이 상의를 벗은 채로 수돗가에서 물싸움 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요. 요즘 제가 툭하면 상의를 벗는 게 습관이 됐는데 아마 그때의 한이 지금까지 쌓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웃음). 또 그게 남자들의 특권 아니겠어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이성에 한참 민감할 때인 청소년기에 혹시 좋아했던 사람은 없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박 씨는 “딱 한 명이 있긴 있었는데 내가 상처만 받았다. 아 물론 ‘여자’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좋아했는데 졸업할 때쯤 용기내서 그 애에게 말을 했다. 내 고백을 들은 여자애가 하는 말이 ‘나도 너 좋아해’였다”라고 답했다. 박 씨는 사랑을 고백한 것이었는데 그 친구는 당연히 우정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어 그는 “그 이후부터 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라며 그때를 회상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박 씨를 6년 내내 괴롭혔던 치마교복에서 해방될 때쯤 또 다른 ‘족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민등록증이었다. 박 씨는 “우리 FTM들은 ‘빨간딱지’라고 부른다. 여자임을 나타내는 주민번호 뒷자리의 ‘2’자를 칼로 긁어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저희 FTM들이 떳떳하게 직장을 가지지 못하고 저처럼 배달이나 일용직에 근무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다 이 주민등록번호 때문이죠. 일단 외모와 신분증의 성별이 매치가 안 되거든요. 한 번은 위조한 신분증을 가지고 취업을 했었는데 술김에 커밍아웃했다가 다음날 바로 해고됐죠. 생계가 너무 어려워 그냥 치마 입고 여자처럼 살아보려고 노력도 했어요. 그런데 여자 옷을 입고 화장을 한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고는 너무 수치스러워 관두고 말았죠.”
한 달 수입이 120만 원가량 된다는 박 씨. 20세부터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사회에 뛰어든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10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2년 전 성전환 수술을 했다. 수술 비용은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5000만~1억 원가량이 필요하다고 한다. MTF에 비해 약 세 배 이상의 돈이 드는 셈이다. 하지만 태국에 가면 많게는 절반까지 그 비용을 줄일 수 있어서 대부분의 트랜스젠더들이 태국에서 수술을 하고 온다고 박 씨는 전했다.
“저도 태국에서 했어요. 솔직히 한국이 잘하죠. 태국에서 하고 와서 후유증 겪는 사람도 많고요. 그런데 그 비용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국가에서 의료보험 대상으로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그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아직도 대다수 기성세대의 눈에는 성전환 수술이 하늘이 정해준 성에 대한 ‘반란’ 정도로 비치는 게 사실. 수술을 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가족들) 반응이라도 들어봤으면 원이 없겠어요. 스무 살에 집에서 나온 이후로 연락이 끊겼거든요.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어요.” 박 씨는 목이 메는 듯 말을 멈춘 후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저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언제부턴가 저를 멀리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저를 ‘언니라고 해야 할지 오빠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때 참 충격이었죠. 괜히 가족들 고생시키지 말고 나 혼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사는 게 낫겠다 싶어 집에서 나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잘했다 싶죠.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가족으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는 “트랜스젠더들이 가장 커밍아웃하기 힘든 대상이 바로 가족들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안 만나면 되지 않나. 그런데 가족들과는 그럴 수도 없고…. 차라리 집에서 나오는 게 가족들은 물론이고 우리도 속이 편하다. 물론 나처럼 자발적으로 집에서 나온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못해 내쫓기는 경우가 많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사회의 시선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무려 20분간 속내를 쏟아냈다.
“솔직히 우리가 수술을 하는 것은 죽기 살기로 하는 거예요. 수술 전에 죽어도 좋다는 각서도 쓰거든요. 그런데 왜 보통사람들은 그저 우리를 ‘흥미’의 대상으로만 보는지 모르겠어요. 또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것도 싫고요. 그래서 대부분의 트랜스젠더들은 언론에 나가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하리수 같은 트랜스젠더 연예인들이 우리들에 대한 시각을 바꿔준 것은 인정하지만 솔직히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냥 조용히 ‘인간’으로 살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박 씨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 호적 정정을 빨리 마무리해서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만들 거예요. 그때는 불심검문에 걸려도 당당히 신분증을 낼 수 있겠죠? 또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도 언젠가는 이뤄야 할 꿈이에요.”
박 씨는 자신의 모습이나 신원이 공개돼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남자끼리’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