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 | ||
지난 90년대 후반 이후 폭력조직은 물리적 강압 행위를 주로 일삼던 양상에서 벗어나 ‘합법성’을 갖춘 사업체 등을 기반으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세를 확장하는 모습으로 변모해왔다. 이는 수사기관의 단속을 피하고 다각적인 자금원을 마련하는 한편 조직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실제로 상당수 폭력조직들은 과거처럼 살벌한 방법을 동원해 영역 다툼에 집중하기보다는 합법을 가장해 지능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소리 없이 실익을 챙기고 있다. 수사당국은 폭력조직들이 이미 건설업종은 물론 벤처업계와 금융업 일각에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언뜻 겉으로만 봐서는 폭력조직인지 아닌지조차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폭력조직의 은밀한 ‘진화’는 계속되는 추세다.
하지만 더 많은 검은 이권을 얻기 위해서는 법의 테두리 안팎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수밖에 없고 조직 간의 경합 또한 불가피하게 마련. 그런 까닭에 근래 들어 폭력조직들은 더욱 교묘하고 지능화된 수법으로 조직을 운영하거나 이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폭세계 일각에서는 현재 추세와는 반대로 70~80년대 폭력조직들의 불법 행위를 답습하는 사례도 적잖게 나타나고 있다.
과연 올해 전국의 암흑가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을까. 검·경찰의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2007년 전국 폭력조직 현황과 올해 조폭 관련 사건에서 드러난 폭력조직들의 새로운 수법과 천태만상을 들여다봤다.
최근 법무부가 각 지방검찰청의 현황을 종합해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에게 국정감사 자료로 제출한 ‘국내 폭력조직 현황’에 따르면, 국내 폭력조직의 수는 471개 파 1만 1476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이미 범죄단체로 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은 조직은 167개 파에 이른다.
지역별로 보면 부산이 칠성파 등 101개 파 1833명으로 폭력조직원 수가 가장 많았으며, 경기 지역(수원 남문파 등 59개 파 1820명)과 광주(국제PJ파 등 33개 조직 1542명)가 그 뒤를 이었다.
서울은 신림동 이글스파 등 105개 파 1400명이 활동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서울중앙지검이 아닌 동부·서부·남부·북부지검이 관할 지역별로 관리·감시하는 조직 계파는 구로동파 등 24개 파 207명에 불과하다. 1개 파당 조직원 수가 평균 1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셈. 자료상으로는 서울 외곽을 거점으로 하는 폭력조직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검찰 자료와는 달리 지난 5월 경찰청이 국회 행정자치위에 제출한 ‘관리대상 폭력조직 현황’에 따르면 국내 폭력조직 수는 222개 파 5269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경기 지역이 29개 파 910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이 23개 파 500명, 전북이 15개 파 488명, 부산 지역은 24개 파 349명이 관리 대상 폭력조직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조직원 수가 가장 많은 폭력조직은 경기 지역의 ‘청하위생파’로 76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과 경찰의 폭력조직 현황이 다른 이유는 집계 기준의 차이 때문이다. 검찰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4조 1항(범죄단체 등의 구성 및 가입)에 해당하는 폭력조직을 계속적으로 관리하는 반면 경찰은 2~3년간 특별한 사건에 연루되지 않을 경우 해당 조직을 관리 대상에서 제외한다.
지난 2005년 6월에는 검찰이 472개 파 1만 549명, 경찰이 213개 파 4826명의 폭력조직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국무총리실에 보고됐다. 검찰이 파악한 현황대로라면 2년여 사이에 1개 파가 준 반면 1000여 명의 조직원이 늘어난 것이고 경찰 현황에 따르면 9개 파 400여 명이 증가한 셈이다.
2007년 올 한 해 검찰과 경찰에서 다뤄진 폭력조직 연루 사건을 분석하면 지난해와는 또 다른 폭력조직의 천태만상과 교묘한 수법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기업 인수ㆍ합병이나 연예 사업 등 새로운 형태의 사업에 단일 폭력조직 혹은 연합 조직이 개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 특히 올해의 경우 폭력조직들이 대규모 주상복합 아파트나 재개발 사업에 깊숙이 관여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과거 폭력조직들이 아파트 사업에 관여한다고 해봐야 시행업체의 용역으로 고용돼 토지 매입과 철거 과정에서 ‘물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로는 시행사를 협박해 일방적인 경호 계약을 맺고 돈을 착취하거나 특정 자재를 도맡아 납품해 폭리를 취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폭력조직이 아예 직접 시행사 설립에 나서는 등 사업 전반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사례가 늘었다.
올해 적발된 몇몇 건설 비리 사건의 경우 사업 시행을 주도한 폭력조직들이 △자금 압박 문제에 부딪힐 경우 상장사에까지 물리적 협박을 가해 약속어음 등을 발행케 하고 이를 통해 수백억대에 이르는 자금을 은행권으로부터 대출을 받거나 △아예 폭력조직이라는 것을 내세워 시행사 지분을 빼앗은 뒤 이사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채 사업권을 팔아 이득을 얻는 신종 수법이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올 들어 여러 차례 파문을 일으켰던 인터넷 도박 사이트 관련 사건을 통해서도 폭력조직들의 대담한 수법이 여실히 드러났다.
최근 전북 익산에서는 한 폭력조직원이 간호원 애인과 카드사 등으로부터 무려 3만여 명의 개인 정보를 빼낸 뒤 이 명의로 도박 사이트에 가입, 사이트에서 가입 축하금으로 받은 게임 머니를 환전하는 기발한 수법으로 수천만 원의 이득을 챙긴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또한 대구에서는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22억 원의 매출을 올린 행동대장급 폭력조직원이 은행원과 짜고 매출금을 자신의 처와 친동생 명의로 된 계좌에 입금했다가 다시 현금이나 수표로 인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익자금 15억 원을 세탁하다가 적발됐다. 이 조직원은 세탁된 자금을 다시 CD(양도성예금증서)로 바꿔 계좌추적까지 대비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박 사이트는 아니지만 지난 7월에는 카지노바로 50억 원대 순익을 낸 전북 I파 서울지역 책임자급 조폭이 친인척 등의 명의로 차명 계좌를 만들어 수익 33억 원을 세탁하려다 검찰에 적발됐다.
지난해부터 사행성 오락실 단속이 심해지면서 자금난에 봉착한 몇몇 군소 폭력조직은 고철 시장에까지 눈독을 들이기도 했다. 특히 서울 동대문시장 노점상 이권에 개입했던 폭력조직 D파는 여러 건설 현장에서 고철 수거권을 따내기 위해 조직원들을 장애인협회에 위장 가입까지 시킨 뒤 건설 현장 18곳에서 12억 원 상당의 수거권을 따냈다가 검찰에 덜미를 잡혔다.
그런가 하면 대전에서는 지역 폭력조직이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에까지 개입하기도 했다. 이들은 특정 후보 당선을 대가로 1억 원을 요구한 뒤 5000만 원의 차용증을 학생으로부터 받아냈다.
한편 연예가의 몇몇 사건을 통해서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폭력조직들이 직접 기획사 운영에 관여하거나 연예 기획사와 스타급 연기자의 전속계약, 캐스팅, 행사 동원 과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태가 드러나기도 했다.
조폭세계의 천태만상 가운데 조직 간의 ‘라이벌전’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엔 조폭들이 합법화·슬림화·점조직화를 통해 수사망을 피하고 조직 간 싸움보다는 공존을 위한 ‘상생’을 도모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지방 폭력조직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권이나 지역 주도권을 놓고 극한 대립을 빚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검·경 자료에 따르면 성남 국제마피아파, 구미 오영이파, 효성이파, 안양 타이거파 등이 올해 경쟁 세력 조직과 치열하게 다툼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지난 2월에는 수원 남문파 조직원 15명이 역전파 조직원의 숙소를 습격해 4명을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히자 다시 역전파 조직원들이 물리력으로 대응, 양측의 7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져 13명이 구속된 바 있다.
지난 9월에는 상대 조직이 아닌 조직 내 핵심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수사기관에 허위로 고소·고발을 남발한 폭력조직원이 검찰에 기소된 바 있다. 자신의 이득과 안위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폭의 속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