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일본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된 뒤 동교동 집앞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 모습(위쪽), 아래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후락 중정 부장. | ||
지난 1998년 <동아일보>가 입수해 보도했던 ‘KT(김대중 전 대통령 지칭) 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에 따르면 납치사건의 최고책임자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이철희 정보차장보, 하 아무개 해외공작국장(8국), 윤 아무개 8국 공작단장, 김 아무개 주일대사관 공사 등에 의해 사건 지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중정의 개입은 사실로 확인됐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린 것인지 살해 목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진실위의 이번 진상 규명은 사건 발생 후 34년 만에 나온 정부 차원의 첫 공식 조사 결과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DJ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힐 만한 직접적인 문서를 확보하지 못한 점과 비록 지병 때문이기는 하나 핵심인물인 이후락 전 중정 부장의 진술을 듣지 못한 점 등으로 인해 ‘미완의 조사’라는 평가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진실위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란을 부르고 있는 DJ 납치 사건의 핵심 쟁점들을 다시 짚어봤다.
1_ 납치의 최종 배후
DJ 납치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가를 두고 그간 세간에선 ‘이후락 단독 지시설’과 ‘박정희 사전 지시설’이 팽팽히 맞서왔다. 우선 ‘이후락 단독 지시설’은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박 대통령의 불신을 받던 이후락 당시 중정 부장이 DJ의 반유신 활동과 관련해 대통령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자 ‘과잉 충성’ 차원에서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는 내용이다.
윤필용 사건이란 1973년 4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돼 윤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거 구속된 사건. 이후락 중정 부장이 이 사건으로 박 대통령의 신임을 잃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대통령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DJ 납치를 지시하게 됐다는 시각이다.
반면 ‘박정희 사전 지시설’은 1971년 대선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로서 박 대통령과 접전을 벌였던 DJ가 국외에서 적극적인 반유신 활동을 벌이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박 대통령이 납치를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진실위는 A4용지 8쪽 분량으로 작성된 ‘최고위 지시자에 대한 판단’이라는 항목을 통해 ‘이후락 부장 단독지시 근거자료’와 ‘박정희 전 대통령 사전 지시 근거자료’를 각각 공개했다.
우선 ‘박 전 대통령 사전 지시설’은 당시의 특수한 정황을 토대로 삼고 있다. ‘DJ가 미국과 일본 정계 등에서 박 정권 지원 중단을 요구하면서 망명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등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이후락 부장에게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납치 사실이 알려질 경우 일본과의 외교문제와 국제사회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할 때 최고 권력자의 지시 없이 이 부장이 독단적으로 이 같은 일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는 것. 당시 박 대통령이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가 모르는 사이에 국가적으로 중대한 공작이 추진된다는 것은 유신체제의 특성상 불가능하다는 시각이다.
몇몇 인사들의 전언도 ‘박정희 지시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작고한 최영근 전 의원이 80년 초경 이후락 전 중정 부장으로부터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어쩔 수 없이 (DJ를 납치)하게 됐다’는 의미의 말을 직접 들었다는 얘기나 이철희 정보차장보가 이후락 부장에게 DJ 납치 지시를 받을 당시 반대의사를 피력하자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말했다는 증언 등이 그것이다.
또 사건 당시 주한미국 대사의 전문 보고에는 ‘(납치 사건이) 박 대통령의 명백하거나 암묵적인 승인하에 추진되었을 가능성’이 언급돼 있기도 했다.
반면 진실위는 이후락 당시 부장이 단독으로 지시했거나 박 전 대통령이 사후에 보고를 받았을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정황자료도 함께 제시했다. 이 같은 ‘사후 보고설’은 이후락 전 부장이나 김정렴 전 비서실장 등 박 전 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는데 예컨대 박 전 대통령이 사후에 DJ 납치에 대한 보고를 받고 크게 화를 냈다는 부분에서 이들의 증언이 일치한다는 것. 이런 점으로 보아 박 전 대통령이 사전에 DJ 납치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시각이다. 진실위는 ‘박정희 사후 보고설’이나 ‘이후락 단독 지시설’의 근거로 다음과 같은 몇몇 정황을 제시하기도 했다.
우선 사건의 핵심인물인 이후락 전 부장이 ‘박정희 지시설’을 줄곧 부인해왔다는 점이다. 이 전 부장은 <신동아>(87년 10월호) 등과의 인터뷰에서 DJ 납치사건에 중정이 개입한 사실을 인정한 바 있으나 박 전 대통령의 사전지시는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또 박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김정렴·김종필·김성진 씨 등도 박 전 대통령의 ‘사후 인지’ 정황을 제시하는 증언을 했다. 특히 이후락 당시 부장에게 직접 구두지시를 받았다는 이철희 전 차장보의 진술과 사건 이후 이후락 부장으로부터 ‘내가 지시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인물들(당시 부장 비서실장 등)의 증언도 나왔다.
이처럼 상반된 ‘설’이 논란을 빚는 가운데 결국 진실위는 그간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울러 진실위는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와 무관하게 대통령 직속 기관인 중정이 납치를 실행하고 사후 은폐까지 기도한 사실에 비춰 박 전 대통령은 통치권자로서의 법적·정치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이번 진실위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납치가 이뤄졌다는 문헌상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점,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을 이후락 전 중정부장의 증언은 없고 전문(전해들은 얘기)과 정황만을 근거로 내린 결론이라는 점 때문에 사건의 배후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2_ 납치의 진짜 목적
당시 중정의 진짜 ‘공작 목표’가 무엇이었는가를 두고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즉 중정이 동경에 있던 DJ를 납치한 이유가 미국과 일본에서 적극적인 반유신 활동을 펴던 DJ의 해외활동을 중단시키고 국내에 데려오기 위해 납치를 했다는 ‘단순 납치설’과 공작과정에서 드러난 정황들로 보아 살해계획도 추진됐다는 ‘살해 목적 납치설’이 서로 부딪치고 있는 것.
DJ 측에서는 그간 “DJ 납치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살해목적의 납치”라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피해자인 DJ는 납치 장소인 호텔방과 용금호에서 각각 토막살해와 수장 등 총 두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사건 발생 당시 미 중앙정보부의 한국 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대사도 미 의회 청문회 등에서 “DJ가 수장될 운명에 있었으나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말해 살해 의도를 가진 납치였다는 DJ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진실위는 ‘공작목표에 대한 판단’이라는 항목을 통해 살해공작을 추진했다는 근거 및 이에 대한 반론을 공개했다. 주요 부분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살해공작 근거·살해공작) ‘KT공작계획서’를 작성했다고 시인한 김 아무개가 “(그 계획은) 일본 야쿠자를 이용한 납치계획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윤 전 단장은 “야쿠자를 활용, 암살하는 안도 포함돼 있었다”고 진술했다.
(반론) 당초 살해안이 논의되었다고 진술한 윤 전 단장의 증언으로 보아 애초에는 살해계획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윤 전 단장 역시 실행과정에서는 단순납치 계획으로 추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다른 관련자들도 살해계획을 부인하고 있다.
(살해공작) 납치 현장인 그랜드팔레스호텔 객실에서 발견된 유류품 중에는 대형 배낭 2개와 32구경 권총실탄 7발이 든 탄창 1개가 있었다. 대형 배낭은 토막살해 후 시신을 담아 파우치(외교용 특수행랑)로 이용하려던 것이고 실탄이 가득 찬 탄창 역시 살해 의도를 시사하는 것이다.
(반론) 사전에 파우치 이송 방안에 대해 논의한 증거가 없다. 현장에서도 토막살해에 필요한 톱, 칼, 비닐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객실에서 발견된 실탄은 공작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한 비상용(자살용)이었다. 총알이 7발이나 들어 있었던 이유는 윤 전 단장이 군 시절부터 탄창에 실탄을 꽉 채우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살해공작) 용금호가 부산에 도착한 후 하루 동안 대기하다가 DJ를 안가로 이동시킨 뒤 이틀간 감금하던 상황에서 갑자기 방면시킨 것은 살해계획의 실패로 인해 미처 신병처리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론) 이후락 전 부장은 87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DJ를) 회복시킨 후에 내보내려 했다”고 해명했다. 당시 DJ가 납치과정에서 상처를 입었고 일본 언론에서 한국정부의 공권력 개입 의혹을 제기하던 상황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진실위는 당시 중정의 ‘공작 목표’에 대해서도 단순 납치였는지, 아니면 살해가 최종 목적이었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단지 진실위는 ‘공작추진 과정이 단기간이라는 점, 단계별로 다수의 인원이 가담한 점, 자진귀국을 위해 DJ를 설득하려 한 점’ 등을 들어 적어도 DJ가 호텔에서 납치한 이후에는 단순 납치 계획이 확정돼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을 내렸다.
또 그간 논란이 되어온 DJ에 대한 수장 위협에 대해서도 ‘배에 감금된 채 재갈이 물리고 손발을 결박당한 피해자로서는 수장을 위한 준비행위로 인식하고 위기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직접적으로 갑판 위에서 바다로 던지려는 시도는 없었다’고 판단했다. 즉 초기 공작목표는 살해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공작이 일정 단계에까지 진행되다 목격자 출현 등의 상황변화로 인해 실행이 중지됐거나 현지 공작관의 판단에 따라 살해계획이 단순 납치로 변경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이에 대해 DJ 측은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애매한 말로 결론을 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배에 태우고 나갈 당시에는 살해할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3_ 야쿠자 개입 정도
중정의 공작 과정에서 DJ 납치 혹은 살해계획에 실제로 일본 야쿠자를 동원하려 했는가 하는 점도 아직 의혹거리로 남아 있다. 진실위 조사과정에서 윤 전 공작단장은 “(애초) 공작계획안에는 제1안이 일본 야쿠자를 이용해 DJ를 납치해 파우치로 데려오는 것이었고, 제2안은 야쿠자를 이용해 제거(암살)하는 것이었다”며 야쿠자 동원 계획에 대해 진술한 바 있다.
당시 주일파견관이던 김 아무개 씨도 ‘KT공작계획서’의 내용에 대해 “일본 야쿠자 10여 명을 매수하여 김대중을 납치해 국내로 데려오는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야쿠자 동원 계획안을 이철희 차장보 등에게 브리핑했으나 야쿠자 대신 주일 파견관들을 동원해 DJ를 납치하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됐다는 것. 사건 관계자들의 진술로 보아 적어도 계획 단계에서 야쿠자 동원 방안이 논의된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는 게 진실위 측의 시각이다.
당시 중정이 공작 수행 과정에서 야쿠자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증언’은 또 있다. 93년 8월 월간지 <인사이드월드>는 재일동포 출신으로 일본 폭력단 야마구치의 두목을 지냈던 양원석 씨(야나가와 지로·사망)의 증언을 통해 DJ 납치 사건 당시 중정이 개입한 정황을 보도했다. 양 씨가 “김 아무개 공사를 만나 김대중 제거에 대한 제안을 받았으나 일본 경찰의 미행과 도청으로 인해 가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는 것.
일본 경찰 간부 출신 니시야마도 이 보도를 통해 “중정이 많은 돈을 주고 야마구치 폭력조직을 동원해서 (DJ를) 미행시키고 자위대에서 은퇴한 정보원을 동원해 미행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또 오사카 지역 거점장 김 아무개에게 ‘김대중을 도중에 죽여서 암매장할 계획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당시 중정이 ‘DJ 납치 사건’에 일본 야쿠자를 동원할 계획을 세웠을 뿐 아니라 실제로 야쿠자에게 일부 ‘작업’을 청부했을 가능성도 큰 셈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