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 구조본에서 재무담당 임원과 법무팀장을 지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제기하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한겨레21 | ||
정·관·재계를 강타한 당대의 사건인 만큼 이를 둘러싼 ‘풀리지 않는 의혹들’ 역시 하나둘 늘어만 가고 있다. 당국의 조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이나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내기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 속에 숨어 있는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관리의 삼성’ 수식어 무색
삼성은 과연 김 변호사의 이번 폭로를 사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정·관·재계 등의 정보를 다루는 인사들 사이에선 이미 몇 주 전부터 김 변호사가 언론을 접촉하며 모종의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 부럽지 않은 삼성 정보라인이 이를 감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삼성 고위직을 지내며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 고위 인사들과 자주 접촉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내부 기밀에 정통했을 김 변호사가 작심하고 폭로할 경우 파장이 커질 것이라는 예측 또한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삼성이 어떤 식으로든 막을 수 있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삼성은 김 변호사에게 임원 재직 시절 모두 100억 원대의 임금을 지급하고 퇴직 이후 3년 동안 예우 차원에서 매달 2000만 원 이상의 월급을 지급했다며 김 변호사의 낭비벽을 은근히 꼬집기도 한다. 폭로의 배후에 ‘돈’이 있다는 뉘앙스다. 이 주장을 역으로 놓고 본다면 돈으로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삼성이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던 점에 대한 의문은 증폭되고 있다.
반면 퇴직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거액의 수입을 챙길 수 있는 김 변호사가 굳이 무리수를 쓰면서 삼성과 적대관계를 형성한 배경이 단순히 돈 때문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삼성의 권력과 재력으로도 어차피 막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김 변호사가 언제든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계좌를 퇴직 이후에도 삼성이 한동안 회수하지 않은 점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많다. 일각에선 김 변호사를 계속 삼성 사람으로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제의 계좌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삼성이 김 변호사가 ‘자신의 검찰 구속’을 불사하면서까지 계좌를 문제 삼고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관리의 삼성’이란 수식어가 무색해지는 셈이다.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지난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조성에 관한 양심고백 내용을 발표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
김 변호사 주장에 따르면 문제의 차명계좌는 우리은행 삼성센터점에서 개설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은행은 전신인 한일은행 때부터 삼성과 주거래은행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삼성본관 2층에 위치한 우리은행 삼성센터점엔 삼성 직원들 급여 통장이 개설돼 있다. 삼성이 굳이 차명계좌를 만들려했다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우리은행 삼성센터점이라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우리은행 입장에선 현행법 위반 논란 확산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김 변호사 주장대로 본인 모르게 차명 계좌가 개설돼 거래가 이뤄졌다면 이는 금융실명제법 위반임에 분명하다. 우리은행 측은 보안을 이유로 문제의 계좌 공개를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 CEO 출신으로 지난 2004년 3월부터 3년간 우리은행장직에 있었던 황영기 전 행장에 대한 이야기도 늘어가고 있다. 황 전 행장은 금산분리 완화 혹은 철폐를 전제로 ‘삼성은행’ 출범시 초대 은행장 후보 영순위로 꼽힐 정도로 업계 인사들 사이에선 삼성의 주 관리대상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우리은행 내 삼성 비자금 차명 계좌 개설 의혹은 삼성 출신 황영기 전 행장이 갖는 상징성과 더불어 호사가들 상상력의 나래를 크게 펼쳐주고 있다.
삼성-황영기-이명박 관계
황영기 전 행장을 향한 세간의 관심은 단순히 삼성과의 인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10월 10일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 선대위 출범식에서 황 전 행장은 경제살리기특위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황 전 행장은 이 후보 당선 시 경제부총리 혹은 금감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우리은행이 서울시의 주거래은행이었던 터라 서울시장 재직 시절부터 이 후보는 황 전 행장과 안면을 터왔으며 지난해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의 경제인 영입 리스트에 황 전 행장이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이 후보는 그동안 금산분리 정책 완화를 주장해 은행권 진출설이 난무한 삼성과의 교감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얼마 전 국정감사장에서 삼성은행 문건을 공개한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은 아예 “이 후보와 삼성이 밀착돼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부 정치권 호사가들은 이번 비자금 폭로가 이명박 후보에게 미칠 영향을 분석하면서 김 변호사 배후에 이 후보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있을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신중한’ 검찰의 배후는
김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보통들 사이에선 삼성 비자금과 관련한 미확인 소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삼성그룹 내 핵심계열사 경영진단이 이뤄질 때마다 용처를 알 수 없는 뭉칫돈 발견 괴소문이 나돌아 업계 호사가들을 바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이들 중 실제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김 변호사의 차명 계좌 폭로에 이어서 나온 민노당 노회찬 의원의 ‘떡값 검사 리스트’ 발언 등은 삼성 비자금에 대한 세인들의 상상력을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차명 계좌나 공직자에 대한 떡값 등은 정식 회계 장부에 드러내기 어려운 항목이란 점에서 별도의 자금 관리 필요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절대 비자금이 아니다”고 강력 부인하고 있다.
▲ 지난 2005년 8월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두하는 이학수 삼성 부회장. 이번 비자금 폭로가 그를 겨냥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 ||
의문투성이인 삼성 비자금 의혹을 해소할 방법은 사실상 관련당국의 본격적인 조사뿐이다. 김 변호사 폭로 이후 국감장에서 검찰 측도 수사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런데 당국의 삼성 비자금 수사가 과연 얼마나 깊이 있게 이뤄질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면서 정치권에선 특검제 도입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정치권 인사들은 검찰이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너무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검찰은 다른 정보기관들처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자체 정보망을 가동해 관련 여론을 수집 분석해왔다. 가까운 일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마무리되기 직전 ‘도곡동 땅은 사실상 제3자 소유’라 발표하면서 내부 정보팀을 가동해 정치권과 여론의 동향을 살폈던 바 있다.
그런데 검찰이 가동하는 주요 정보라인이 이번 일과 관련해선 첩보 수집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다른 정보기관의 인사들은 “(검찰이) 애써 이번 건을 축소 폄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하기도 한다. 일부 정치권 인사들은 삼성에버랜드 수사를 사실상 마무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삼성 건을 파헤쳐야 하는 검찰의 부담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의 떡값 검사 리스트가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검찰 조직 내 ‘친 삼성’ 세력 존재에 대한 세인들의 궁금증 역시 커지고 있다.
몇몇 정보기관원과 재계 정보통들 사이에선 ‘김 변호사 건이 보도되기 전 검찰 수뇌부가 이를 미리 감지하고 보도내용 사전 확인에 나섰다’는 미확인 정보가 나돌기도 했다. 일각에선 삼성의 매머드급 법무라인과 학연 지연 등으로 연결된 방대한 인맥 틈바구니 속에서 김 변호사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여러 측면에서 검찰이 이번 건에 대해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관측되지만 그렇다고 조용히 넘어갈 경우 검찰과 삼성을 둘러싼 유착 의혹이 거세질 것이란 시각 또한 확산되고 있다.
김 변호사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검찰조직이 자신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경력이 그쯤 되는 사람이 이런 폭로를 했으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겠냐’는 이야기도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김 변호사는 또 ‘나만 구속되면 끝’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는 자포자기가 아닌 자신감의 발로라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김 변호사로 인해 촉발된 이번 사태를 두고 그의 양대 친정격인 검찰과 삼성이 어떤 역학관계를 펼쳐나갈지도 두고 볼 일이다.
궁극적 타깃은 이학수?
이번 폭로로 인해 삼성그룹 총수인 이건희 회장의 고심이 가장 깊어졌겠지만 실질적 최대 피해자는 이학수 부회장(전략기획실장)일 것이란 의견이 나온다. 김 변호사는 이 부회장의 고려대 후배다. 이 부회장으로선 ‘학교 후배 하나 건사하지 못했나’란 내부 비판을 들을 수도 있는 셈이다. 삼성 입사 이후 안기부 도청 문건 사건과 불법 대선자금 수사 등을 겪으며 삼성 고위인사의 검찰 소환조사와 관련해 김 변호사가 이학수 부회장과 심한 대립각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결국 지난 2004년 김 변호사는 선배인 이종왕 법무실장이 영입되면서 삼성을 떠나게 된다. 김 변호사의 퇴사 당시 정보기관 인사들과 업계 정보통들 사이에선 ‘이종왕 실장 입사 직전부터 김 변호사가 법무팀 결재라인에서 제외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바 있다. 이 부회장과의 갈등 때문에 김 변호사가 삼성화재 부사장 승진 제의를 거절하고 삼성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같은 소문들의 범람은 사실 여부를 떠나 삼성의 정보·홍보·대관 라인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는 평을 듣는 이 부회장의 리더십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김 변호사의 폭로 배후에 이 부회장의 입지를 흔들어주길 바라는 세력이 있을지 모른다는 ‘음모론’마저 등장한 실정이다. 일부 기관원들과 재계 정보통들이 앞 다퉈 이 부회장의 향후 입지에 대한 보고서를 윗선에 올렸다는 이야기도 파다하다.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그룹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내부 힘겨루기 과정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반대세력이 하나둘 등장하게 됐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김 변호사라는 관측인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