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을 전공하고 한국사를 비롯해 동서양의 역사를 두루 연구 중인 작가 이한 씨가 <조선왕조실록> 속에 숨어 있는 기이한 이야기들을 모아 <조선기담>(청아출판사)을 펴냈다. 이 책에 수록돼 있는 사건들은 과거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가려져 있던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내 현실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 가운데 왕실과 선비 사회에서 벌어졌던 몇 가지 기이한 사건들을 발췌, 간추렸다.
성종은 ‘허생’?
현재 우리에게 후추는 흔히 볼 수 있는 향신료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후추가 비싸게 여겨진 이유는 국내에서 재배되지 않아 희귀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후추를 조선에 재배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왕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1482년 4월 17일, 성종은 예조에게 후추의 씨를 구하라는 ‘후추씨 원정대’프로젝트를 명한다. 성종의 명을 받은 예조는 후추의 생산지를 알기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 일본의 유구국(현재 오키나와)보다도 더 남쪽이 산지라는 것을 일본사신에게 전해들었다. 하지만 후추의 산지가 아주 먼 남쪽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성종은 후추 재배의 의욕을 꺾지 않았다. 후추가 일본에서 왔으니 유구국을 통해 씨앗을 얻을 수 있도록 요청해보라는 명을 내린 것.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본이 후추 씨를 구하는 명목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오자 많은 신하들이 성종의 후추 프로젝트에 반대했다. 일본의 사신들은 후추 씨앗을 구해준다는 빌미로 거액을 달라고 하거나 대장경은 물론 여러 귀중한 책자를 달라고 요구했다. 성종은 중요 신하들과 후추 씨앗 구하는 일을 의논할 만큼 이 문제를 중요시 여겼지만 신하들은 부정적이었다. 토양과 기후가 달라 씨앗을 구해도 재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좀처럼 ‘후추씨 원정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몇 년에 걸쳐 왕이 후추를 모은다는 소문이 나자 일본인들은 꾸역꾸역 후추를 바쳤다. 이것이 어느새 부담스러울 만치 창고에 가득 차게 됐다. 그런데 모아들인 것 이상으로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도 덩달아 후추를 모아들이니 민간의 후추 가격도 크게 폭등한 것이다.
이후로 성종은 창고에 그득히 쌓여 있는 후추를 신하들에게 대방출했다. 투호놀이를 할 때 후추를 내려주기도 하고 무예훈련을 하면서 활을 잘 쏘는 사람에게 후추를 내리기도 했다. 어떤 때는 예쁜 채색 주머니에 담아 조정 내 대부분의 관리들에게 하사했다.
성종이 이렇게 후추를 뿌려댄 것은 물론 후추가 지나치게 많아져서 창고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후추를 시중에 풀어 널리 퍼지게 하고 비정상적으로 치솟아 오른 후추의 가격을 가라앉히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금인 성종이 이토록 후추 재배에 열의를 보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당시 중국과의 교역품목에 후추가 많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후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중개무역을 통해 이익을 올리고 있었던 것. 후추의 재배와 생산을 왕실이 관장하게 되면 막강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신권에 비해 자꾸만 약해지던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성종의 노림수가 보이는 듯하다.
딸사랑 지나쳤던 중종
중종은 유난히 자식들을 아끼는 정 많은 아버지였다. 중종 39년 2월 19일 기록을 보면 중종이 급히 명령을 내려 넷째딸 효정옹주의 남편인 조의정을 의금부에 가두고 처벌하라는 내용이 있다. 효정옹주가 갑작스럽게 죽은 날 부마 조의정을 하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중종이 지적한 조의정의 잘못을 요약하면 귀하게 기른 딸을 시집 보내놓았더니 사위가 망나니였고, 그것도 모자라 첩을 예뻐하며 딸을 구박했다는 것이다. 중종은 사위 조의정과 더불어 그의 첩 풍가이 또한 의금부에 하옥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조의정은 처음에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다가 국문을 시작한 하루 만에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했다.
하지만 조정의 여론은 중종의 편을 들지 않았다. 중종의 명령이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모습이지만 나라의 왕으로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것. 특히 결정적으로 여론을 움직이는 데 기여한 것은 첩인 풍가이였다. 흔히 첩은 사악한 악녀의 이미지이지만 풍가이는 이런 이미지와는 다른 여인이었다. 효성이 깊었고 국문을 당하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결국 조의정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귀양을 가고 풍가이는 곤장 100대에 삼천 리 바깥으로 귀양 보내는 처벌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풍가이가 살해당하면서 문제가 커지게 된다. 사헌부의 조사에 따르면 곤장을 맞고 풀려난 풍가이를 상궁 은대가 10일 동안 가두었고 곤장 맞았던 곳을 더 때린 뒤 장고(醬庫)에 스무 날 동안 버려두어 마침내 풍가이가 죽게 됐다는 것.
상황은 뒤집혀 신하들은 은대를 비난했다. 그러나 중종은 효정옹주의 이모뻘인 은대를 감싸고돌았다. 이 사건은 왕과 신하들의 기 싸움으로 변질됐다. 대신들이 은대를 처벌할 것을 여덟 번이나 요구했지만 중종이 듣지 않자 사간원들은 모조리 파업을 벌여 직무를 내팽겨쳤고 중종이 아홉 번이나 명령을 해도 듣지 않았다. 결국 좌의정과 우의정이 나서 은대를 귀양 보내 조정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말하자 중종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은대를 귀양 보내도록 명령했다.
▲ 드라마 <왕과 나>에 등장하는 ‘성종’(고주원 분). 오른쪽은 드라마 <이산>의 ‘정조’(이서진 분). 정조는 외국에서 유입된 문물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고 한다. | ||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드센 어머니인 문정왕후 밑에서 주눅 들어 살았던 명종은 어렸을 때부터 궁궐에서 살아 늘 외로움에 시달렸다. 이런 명종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던 것은 환관들이었고 결국 명종이 유일하게 곁에 두고 마음을 주는 사람이 됐다. 신하들은 명종에게 환관과 궁첩을 가까이하는 시간을 줄일 것을 요구했지만 명종은 건강을 이유로 신하들과 만나는 일이 차츰 드물어졌다.
환관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았던 이가 정번이었다. 명종은 그를 무척이나 은애했고 그 이상으로 의지했다. 명종은 음악을 잘 아는 정번에게 노래를 부르게 해서 이를 듣기도 하고 함께 짝을 지어 활을 쏘기도 했다고 한다. 정번은 환관이면서도 벼슬이 2품에 이르렀고 다른 환관 10여 명도 그렇게 되었으니 명종의 시대는 환관들의 전성시대였다.
명종이 환관에게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내가 아니라면 네가 왕이 될 수 있었겠느냐”라는 말로 명종의 숨을 막히게 했고 조정은 신하들의 파벌싸움으로 왕은 뒷전이었다. 결국 명종은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를 가지지 못했고 차선책으로 환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툼레이더’ 프로젝트
조상을 잘 모셔야 집안이 평안하고 사람도 잘된다는 생각은 조상의 묘를 좋은 명당에 모셔야 한다는 풍수지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풍수지리가 성행했는데 특히 조선 왕실에서의 관심이 각별했다. 그런 와중에 태조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의 어머니 황고비의 묘소 행방을 놓고 한때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전부터 강원도 삼척 일대인 황지에는 노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어딘가에 황고비의 묘소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신하들이 조사해볼 것을 권유하자 찾아보라는 지시를 했다. ‘무덤 조사팀’이 구성되고 황지의 어느 산 속에 현지인들이 몰래 숨기고 있는 무덤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조사에 착수했다.
어릴 때부터 그곳에 살아온 사람에 따르면 마을사람들이 나무를 잘라 무덤 위에 덮고 조선왕조의 선조 무덤이라는 말을 전했다고 했다. 현지에서 모은 또 다른 소문으로는 원래 무덤에 비석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왕실의 무덤을 관리하는 부역을 하게 될까봐 두려워 숨겼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무덤의 위치를 파악하고 조사를 벌였지만 확인 결과 비석으로 알려진 것은 자연석이었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해 황고비의 묘소 찾기 프로젝트는 어정쩡하게 막을 내렸다.
조선왕조가 수백 년이나 이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황고비의 무덤을 찾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효를 최선으로 여기는 유교의 나라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현실도피다. 황고비의 묘소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특히 선조와 인조 때 있었다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
두 임금의 공통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을 겪었다는 것이고, 둘 다 정통이 아니면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선조의 무덤을 찾아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혹은 자신들이 당한 화가 조상을 잘못 모신 죄라는 생각에 조상의 묘소를 잘 모신다면 복이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을 법도 하다.
세종 20년,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성균관 근처에서 ‘양갓집 여인’이 성추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주범은 성균관 생원 최한경과 정신석으로 더운 날씨에 멱을 감다가 옷을 ‘홀딱 벗은 채’(실록에는 한층 점잖게 ‘의관을 입지 않은 채’라고 씌어 있다) 길을 가던 여인에게 달려들었던 것. 두 사람은 이 여인의 여자종들을 내쫓고 여인을 껴안기까지 했다.
변을 당한 여인은 양반 홍씨 집안의 첩 ‘소앙’이었다. 소앙은 사헌부에 최한경과 정신석을 강간미수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소앙이 자꾸 진술을 바꿔 강간미수는 결국 ‘희롱’으로 판결났다. 가해자인 최한경과 정신석은 끝까지 단지 희롱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는데 조선시대에 여성을 성폭행하는 것은 무거운 범죄로 이유를 막론하고 목을 졸라 죽이는 교살형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신석과 최한경은 곤장형에 처해졌다.
이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이름을 올린 것은 이처럼 성희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문종과 세조, 예종에 이르기까지 같은 이름의 인물들이 활약한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이름, 같은 한자를 쓰는 사람들은 대단히 희귀하기에 같은 사람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이곳을 다니는 사람은 미래와 출세가 보장되어 있어서 조정의 중진으로 활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최한경은 특히 단종에게 글씨를 잘 썼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세조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정신석은 사관으로서의 사명감과 남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비록 실록의 첫 등장이 성희롱이었지만 이들의 이후 행적은 젊은 시절에 외도의 유혹에 빠질 법한 젊은이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다.
소설에 빠진 관리들
정조 16년 10월 24일의 기록. 늦은 밤 정조는 사초를 적고 있던 주서(注書·승정원에 속한 벼슬)를 시켜 예문관의 숙직 상황을 살펴보았다.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산더미같이 쌓인 책들을 읽고 있는 숙직관리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을 즈음에 분위기가 이상해 살펴보니 다들 <평산냉연>이라는 연애소설 등을 탐독하고 있었다.
정조는 신하들이 공부는 안하고 연애소설을 돌려봤다는 것에 크게 진노하여 관련자들을 파직시키거나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처벌했다. 재밌는 것은 처벌받은 신하 중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훗날 정조와 사돈이 되었고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던 안동 김 씨 가문의 김조순도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었던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었을까. 이는 정조의 개인 독서 취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당시 소설의 유행은 중국에서 수입된 책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중국에서 유입된 서학과 과학기술 등 서양의 학문은 사람들의 호기심 이상으로 공포와 불안감을 일으켰다. 조선은 성리학을 토대로 세워진 나라. 따라서 수입된 외래지식은 조선의 근간을 흔들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기에 정조를 포함한 당시 조선의 통치자들은 이것을 막고 싶어 했다. 통치하는 내내 정조가 서학을 비롯하여 이단을 금지하는 명령을 몇 번이나 내렸고 탈선하는 신하들을 단속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