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 대선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김 변호사의 주장은 과거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결과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대선자금 수사 당시 삼성은 줄기차게 회사 비자금이 아닌 이건희 회장의 개인 돈이 정치권에 제공됐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검찰은 수사 초 그룹 계열사가 조성한 부외자금이 대선자금에 포함된 단서를 포착하기도 했으나 삼성의 주장을 뒤집지는 못했다. 자금의 성격과 출처를 규명하는 것은 당시 삼성의 대선자금 제공 관련 수사의 핵심이었다. 만약 회사 비자금이 대선자금으로 쓰였다는 김 변호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질 수밖에 없다. 당장 비자금 규모 및 조성 방법 등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삼성은 김 변호사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하고 있다. 김 변호사가 언급한 차명계좌는 회사 비자금 관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임원 개인이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며 따라서 비자금이 정치권에 제공됐다는 주장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어찌됐든 김 변호사의 폭로로 인해 당시 삼성이 정치권에 제공한 대선자금의 출처 및 규모에 또 하나의 물음표가 던져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 변호사는 최근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대선 때 삼성 계열사 사장들이 개인 명의로 정치권에 제공한 후원금은 모두 회사 비자금에서 나왔고 나머지 선거자금도 대부분 비자금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에 건넨 삼성의 대선자금이 모두 이 회장 개인 자금에서 나온 것이라는 검찰 수사 결과와는 상반되는 주장이다. 또한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지난 2004년 불구속 기소된 이학수 부회장의 법정 진술 내용과도 전면 배치되는 발언이다.
이 부회장은 당시 법정에서 “주식 매입은 투기 의혹이 불거질 수 있고, 예금 거래도 외부에 알려질 가능성이 있어 (이 회장 재산으로) 주로 무기명 채권을 구입해 정치권에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김 변호사 주장대로라면 무기명 채권 구입에 사용된 돈의 성격을 원점에서 다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 그 다음으로 비자금이 돈의 성격만 바뀐 채 채권 구입에 이용됐는지 아니면 비자금이 채권이 아닌 다른 형태로 전달됐고 삼성이 내놓은 채권 복사본과 전달 과정 등은 시나리오에 불과한 것인지를 따져야 하는 ‘경우의 수’가 발생하는 셈이다.
삼성이 정치권에 건넨 것으로 지난 2005년 검찰이 최종 확인한 채권 액수는 약 360억 원(이회창 캠프 324억 7000만 원 △노무현 캠프 21억 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15억 4000만 원)이다.
사실 여하에 따라서는 이처럼 삼성 측이 정치권에 채권을 전달한 근거로 검찰에 제시했던 360억 원의 채권 사본이나 사용처 중 일부에 ‘허수’가 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의문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에는 삼성이 2000년에서 2002년 사이 사채시장 등에서 837여억 원 상당의 채권을 매입했고, 이 가운데 360여억 원의 채권 사용처만이 밝혀졌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가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결론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 변호사 주장대로 대선자금의 출처가 검찰 수사 결과 및 삼성의 주장과 다르다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각각 40억 원과 15억 원씩 제공된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현금도 실제 정치권에 전달된 액수와 일치한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김 변호사는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대선자금 수사 당시 상사가 자신에게 ‘현금 수백억 원이 정치권에 전해졌다는 말을 한 사실이 있다’고 고백, 이러한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 경우 대선자금으로 제공된 돈이 이 회장 개인 돈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던 이 부회장과 삼성 측의 진술과 주장에도 의문 부호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 부회장이 본인 선에서 회장의 개인 돈을 회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정치권에 전달했다는 진술부터가 의문이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자신의 재산이 채권으로 매입되거나 현금으로 정치권에 건네지는 것을 이 회장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지난 2004년 6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최완주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이 부회장에게 “수백억 원이나 되는 돈을 회장에게 아무런 이야기 없이 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고 묻기도 했다.
당시 이 부회장과 삼성 측은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정치권에 건넨 채권과 현금의 규모를 정확하게 진술하면서도 이 회장 개인 재산 규모나 관리 방법 등에 대해선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혹시 이 회장 개인 돈이라는 주장에 논리상의 오류가 드러날 소지를 막기 위해 구체적인 진술을 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의문을 사는 대목이다.
현재 김 변호사는 삼성 계열사의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전달됐다는 부분에 대해 “상식적인 일”이라며 강한 확신을 나타내고 있다.
과연 누구 말이 사실일까. 김 변호사의 주장이 맞다면 대선자금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고 대선자금 출처와 이 회장 개인 재산에 관련한 삼성의 주장은 그럴듯한 소설로 전락하고 마는 셈이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