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퇴임 2년 만에 30여 년간의 공직생활을 담은 회고록 형식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 ||
<허준영의 폴리스 스토리>(중앙일보시사미디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에는 허 전 청장이 5년간의 외교관 시절을 거쳐 26년간 경찰에 몸담으면서 경험한 갖가지 에피소드와 유명인사들에 얽힌 뒷얘기가 회고록 형식으로 담겨 있다. 고대 행정학과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거쳐 80년 14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허 전 청장은 ‘외교관 출신 경찰’이라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경찰청장 재임 시절 ‘권검책경’(權檢責警:권한은 검찰에게 있고 책임은 경찰이 진다는 의미)이라는 발언으로 경찰의 자존심을 세워놓기도 한 허 전 청장은 책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궤적들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허 전 청장은 책머리에서 “개인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회고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공직에 머무르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국정 현실과 공직사회를 정리해보고 싶었다”고 출간 배경을 밝히고 있다. 책 속의 몇 가지 일화들을 간추려 소개해본다.
허 전 청장이 부산남부경찰서 대공과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는 당시의 서슬 퍼렇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5공화국 시절 대통령이 지방순시를 할 때 대통령은 시·도지사 관사에서 유숙했는데 당시 부산시장 관사가 허 전 청장이 근무하던 부산남부서 관할이었다고 한다. 황령산 기슭 높은 언덕에 위치한 이 건물은 당시 시가로 50억 원을 호가해 ‘지방 청와대’라 불렸고 평상시는 대통령 전용 숙소인 본채의 복도와 주요 집기를 흰 천으로 덮어놓고 관사의 주인인 시장조차 함부로 접근치 못하도록 했을 만큼 보안이 엄격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이른바 ‘심기 경호’ 차원에서 대통령 숙소 주변의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막기 위해 일선 경찰서로 하여금 동네 강아지와 병아리 수까지 파악토록 했는데 새끼를 치는 탓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지 못해 실무자들이 적잖은 애를 먹었다는 것.
경찰총수까지 역임한 허 전 청장이 미제사건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심정을 고백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허 전 청장이 서울북부서 수사과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해결하지 못한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것이 어찌나 마음에 걸렸던지 허 전 청장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갈 때마다 ‘저들 속에도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다니는 자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는 것.
하지만 “수사업무는 힘들고 고달프지만 때로는 보람과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일”이라는 게 허 전 청장의 얘기다. 한 에피소드를 소개해본다. 허 전 청장이 1987년경 당직을 서고 있는데 ‘강간치상’으로 잡혀온 한 농촌총각이 유치장에서 ‘강간 안했다’며 서럽게 울부짖더라는 거다. 사연은 이랬다.
그 총각이 한 처녀와 선을 봤는데 당사자들은 마음에 들어 했지만 처녀 부모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총각은 처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면 부모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처녀를 불러내 소주를 마시고 여관으로 향했다고 한다. 당시 처녀가 잠시 저항을 하긴 했지만 강압적인 관계는 아니었다는 것이 청년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처녀의 부모가 처녀의 갈비뼈에 금이 갔다는 방사선 사진을 근거로 총각을 강간치상으로 고소한 것이었다.
총각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어본 허 전 청장은 방사선 사진 판독에 오류가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을 지시했고 결과는 갈비뼈가 금이 간 것이 아니라 수년 전 폐결핵을 앓은 처녀가 치료과정에서 흔적이 남은 것이라는 판정이 나왔다고 한다. 허 전 청장은 양가 부모들을 모아놓고 ‘이왕 일이 이렇게 됐고 당사자들이 서로 원하니 결혼시켜 잘 살도록 해주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고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고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허 전 청장이 대통령 치안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청와대 386 참모진과 겪었던 갈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당시 허 전 청장은 유인태 정무수석으로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치안비서관으로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 정무비서실에는 유 수석 밑에 6명의 비서관이 있었는데 허 전 청장을 제외한 5명은 모두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에 허 전 청장은 순간 ‘이거 잘못 들어온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머리가 띵해졌지만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을 때부터 따랐던 사람들이라면 높은 혜안을 가진 사람들일 거라고 기대했다는 것. 하지만 비서관들의 행실은 직업공무원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불과 2~3명에 불과했을 만큼 실망스러웠다는 게 허 전 청장의 얘기다. 특히 밤늦게까지 토론을 했다고 다음날 한낮이 되도록 자거나 유 수석을 회의 도중에도 ‘형’이라고 부르는 등 상사에 대한 예의가 엉망이었다는 것.
대통령 취임 직후 허 전 청장은 이들 비서관들과 안면도 익힐 겸 저녁식사를 자주했다고 한다. 허 전 청장은 “반주는 항상 소주였는데 양주 얘기를 꺼내면 몰매를 맞을 것 같은 분위기가 상당히 신선했다. 또 2차로 노래방에 가서 이들이 운동권 가요를 부를 때는 좋게 보이기도 했지만 대법관과 공안검사 등을 콕 집어 도마에 올려놓고 신랄하게 비판할 때는 섬뜩하기도 했다”고 당시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1월 19일 청와대에서 신임 허준영경찰청장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모습. | ||
특히 법을 무시한 일부 비서관들의 무리한 요구는 납득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허 전 청장의 고백이다. 한번은 효순·미선 양 사망사건 시위와 관련해 경찰이 불가피하게 주동자 몇을 연행한 적이 있었는데 비서관들은 연행자들이 자신의 친구 또는 선후배라는 이유로 그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이에 허 전 청장이 “경찰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판단해서 움직여야지 정치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고 한마디 했더니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는 것.
당시 유인태 수석이 “그 ○○들이 얼마나 애를 먹였으면 경찰이 연행해 갔겠느냐. 그런 ○○들은 ○○○ 패버려야 돼”라고 수습함으로써 한바탕 웃고 넘어갔지만 이후로도 연행된 사람들과 동지적 관계에 있는 비서관들의 법을 무시한 훈방 요구로 인해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 치안비서관으로 있던 1년 동안 대통령과 한 번도 독대한 적이 없었던 허 전 청장과는 달리 다른 비서관들이 아침저녁 가리지 않고 대통령과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386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 좀 더 광범위하게 많은 인사를 만나 많은 얘기를 들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 전 청장은 자신이 386 비서관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청와대에 있는 386 인사들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밝혀 불필요한 오해를 차단하고 있다.
실제로 허 전 청장은 청와대 비서관 시절 중 신선하게 다가왔던 경험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유인태 수석의 제의로 수석과 비서관이 돌아가면서 유사(有司)를 맡아 한 달에 한 번씩 일요일 저녁에 부부동반으로 문화예술 활동을 했던 것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여유를 찾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한다. 또한 청와대에선 비서관·행정관 인사가 있어도 다른 조직과 달리 큰 동요가 없었다고 한다. 직장을 그만두면 끝장나는 것으로 아는 통상적인 직업공무원과 달리 적성과 의지에 따라 사직도 불사하는 조직 분위기는 허 전 청장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삐딱선’을 타게 된 배경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허 전 청장은 “경찰청장이 된 후 내가 생각하는 국가, 국민의 길과 참여정부가 추구하는 길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국가보안법 존폐 문제 및 강정구 교수 건 등으로 청와대와는 어쩔 수 없이 결별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허 전 청장은 자신이 퇴임하게 된 계기가 된 농민 사망사건과 관련, 책임대상의 부당성을 강한 어조로 지적하고 있다. 허 전 청장은 기자회견까지 열었던 대통령의 사과 방법에 대해 정치기반을 끌어안기 위한 과도한 제스처를 취한 것으로 보고 당시 사건의 속죄양은 경찰청장이 아닌 행자부 장관이 됐어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3년 발생한 한총련 학생들의 미군기지 난입사건 당시에도 행자부 장관이었던 김두관 장관이 사퇴한 것을 언급한 허 전 청장은 “경찰청장의 2년 임기가 보장돼 있는 것은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말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불편부당하게 치안총수의 책무를 수행하라는 뜻인데, 데모꾼이 미군기지에 난입한 것은 장관이 사퇴해야 할 사유고 농민이 사망한 것은 청장이 그만둬야 한다는 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허 전 청장은 퇴임 후 겪은 작은 에피소드에 대해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퇴직 후에 해외여행을 했는데 허 전 청장 가족은 그룹 투어로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장시간 쪼그리고 앉아 오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릴 때 보니 1등 칸에서 이 정권의 새파란 실세가 어린 자녀까지 데리고 유유자적 나오는 것을 보고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허 전 청장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기고 있다.
“이 실세가 1등 칸에 탄 것을 이상하게 보고 계좌를 추적해 스폰서한 사람을 찾아내고 스폰서의 사업계약 당시 통화기록을 추적하고 어쩌고 하면 이 실세도 한 칼에 보낼 수 있을 것 아닌가? 상상해본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지… 헷갈린다. 여기에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사회 분위기도 일조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회를 꾸려가야 한다. 사업가나 공무원 중 소심한 사람들은 나하고 만나다 이 정부 눈 밖에 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어찌 보면 인간 세상의 재미있는 일면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