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30일 삼성증권 본사를 전격 압수수색한 검찰이 압수물 상자를 들고 나오고 있다. 이날 수색으로 130여 개의 삼성증권 차명계좌를 발견한 검찰은 앞으로 이 계좌의 흐름을 추적하면 삼성 비자금의 ‘몸통’을 발견할 것으로 보고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연합뉴 | ||
검찰은 삼성증권을 삼성그룹의 ‘비자금 저수지’로 주목하고 4일간의 압수수색을 벌였다. “대선 후 벌어질 특검 수사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 중”이라는 검찰은 과연 이번 압수수색 등으로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걸까. 또 이번 수사는 향후 특검 수사와는 어떻게 이어지게 될까.
삼성 비자금을 수사해온 검찰 특별수사감찰본부(특본)는 지난 11월 30일부터 3일까지 무려 나흘간 삼성증권 등을 압수수색했다. 한 기업을 4일 동안 압수수색하는 것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김수남 검찰 특본 차장검사는 압수수색이 끝난 뒤 “삼성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해 서울시 종로구 종로2가 삼성증권 본사의 임원실 10여 곳과 전략기획실, 직원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각종 문서와 컴퓨터 등의 저장장치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당시 검찰은 삼성그룹 비자금 관련 차명계좌를 보유한 것으로 의심되는 임원들의 명단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압수수색을 벌였다.
검찰은 특히 당시 압수수색에서 차명계좌로 의심되는 계좌의 전산자료만 따로 옮겨 담는 등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행보를 보여 관심을 끌었다. 무차별적으로 하드디스크와 장부 등을 압수·수색하는 기존의 ‘융단폭격’ 방식 대신 자로 잰 듯한 ‘정밀폭격’을 한 것이다. 검찰은 이처럼 정밀한 압수수색을 한 것은 삼성증권이 국내 거대 증권사의 하나로 이 사건과 무관한 제3의 고객 정보를 상당 부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삼성증권 ‘정조준’?
그렇다면 검찰이 많고 많은 삼성 계열사 가운데 삼성증권을 삼성의 비자금 저수지로 지목하게 된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먼저 검찰이 삼성증권을 삼성그룹의 비자금 저수지로 지목했던 것은 김용철 변호사를 비롯한 내부 제보 때문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차명계좌 가운데 삼성증권계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변호사가 폭로한 차명계좌의 수는 7개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검찰이 김 변호사의 차명계좌 추적을 통해 삼성증권에서 차명계좌로 의심되는 130여 개의 계좌를 미리 발견해 압수수색을 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검찰도 현재까지 김 변호사의 차명계좌를 확인 중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검찰이 이번 수사와 관련해 김 변호사 외에 또 다른 핵심 제보자를 확보하고 있거나 삼성증권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축적해놓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검찰은 실제로 삼성증권의 한 전직 직원이 차명계좌를 관리했다며 차명계좌와 관련된 임직원 명단 100명을 폭로한 리스트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은 이 자료가 미리 입수된 것이 아니라 삼성증권 감사실 압수수색으로 발견된 것이라고 확인해줬다. 삼성증권 측도 “사기죄로 수배 중인 전 삼성증권 직원 박 아무개 씨가 임의로 만든 리스트”라며 “비자금 계좌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검찰 역시 전 직원 박 씨와 회사 감사팀이 주고받은 이메일의 내용을 정밀 분석 중이며 박 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신병확보에 나선 상황이다. 상대적으로 제보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와 같은 리스트도 검찰이 삼성증권을 정확하게 치고 들어갔기 때문에 얻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검찰이 삼성증권을 비자금의 저수지로 주목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삼성증권을 막연히 압수수색을 한 것이 아니었다. 검찰의 삼성증권에 대한 압수수색은 상상외로 정밀했다. 핵심 제보자가 없다면 불가능할 정도였다. 검찰은 “우선 삼성증권을 압수수색한 것은 경영권 승계나 차명계좌 확인 차원이 아니라 비자금 수사와 관련 있다”는 점을 압수수색 후에 분명히 밝혔다. 한번 뒤져보자는 식의 수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 로그인 기록· IP 추적
실제로 지난 11월 30일 특본 김수남 차장은 압수수색을 시작하면서 “경영승계가 아닌 비자금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압수수색이 나흘간 계속되던 지난 3일 김 차장은 한술 더 떠 “삼성증권 임직원 몇 명의 로그인 기록과 컴퓨터 사용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IP주소(컴퓨터 네트워크망에 220. 110. 255. ××× 따위로 뜨는 네 자리 숫자)를 찾는 중”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삼성증권의 일부 관계자가 삼성그룹의 비자금 관리를 위해 일해왔으며 검찰이 이들이 비자금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그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특히 검찰이 인터넷 사용자의 주소를 알 수 있는 IP를 추적하고 있는 것은 삼성증권 임직원의 로그인이 삼성증권 종로 본사나 영업장에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즉 삼성증권 직원이 아닌 서울 중구 태평로의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에서 차명계좌의 입출금을 진행했는지 여부를 살피기 위해 IP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삼성증권이 아닌 삼성 본사의 IP에서 로그인이 진행된 계좌라면 그 계좌는 삼성 비자금 운용 계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검찰이 삼성증권의 계좌 성격과 운용방식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다.
또 검찰은 일부 임직원이 여러 계좌를 하나의 비밀번호로 로그인해 관리해온 정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 한 사람이 여러 명의 계좌를 관리해왔다면 해당 계좌가 차명계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검찰은 삼성증권 일부 관계자들이 한두 개의 비밀번호로 40~50여 개의 계좌를 관리해왔다는 정황을 잡고 이들 계좌와 입출금 내역을 압수수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검찰의 송곳 같은 압수수색 능력은 삼성그룹을 이미 한 번 뒤져본 경험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03년 대선자금 수사를 앞두고 대검 중수부는 당시 ‘(실명거래가 안 돼) 귀신도 못 찾는다’는 국민주택채권의 사채시장 흐름을 밝혀냈다. 한 해 그 규모가 수십조 원에 이른다는 ‘검은돈’의 실체에 상당 부분 접근했던 것이다.
당시 검찰은 국민주택채권 등 고액채권의 매입자와 최종 출금자를 비교해 불일치할 경우 이들에게 불일치 경위를 역으로 되묻는 방식 등으로 검은돈의 흐름을 캐냈다. 검찰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삼성은 물론 SK, 한화, 금호그룹 등의 채권이 정치인들에게 불법정치자금으로 지급된 사실을 파악했고 이 계좌추적의 개가는 대선자금 수사의 성과로 이어졌다. ‘무기명 채권은 안전하다’는 블랙머니마켓의 신화가 깨진 것이다.
▲ 김용철 변호사의 충격고백으로 시작된 삼성 비자금 파문이 검찰의 삼성증권 압수수색으로 점점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비자금 수사’임을 정확하게 밝힌 검찰의 수사를 두고 또다른 핵심 제보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돌고 있다. | ||
특히 당시 대검 중수부는 삼성그룹 측이 2002년부터 무려 850억 원을 투입해 명동 사채시장에서 국민주택채권 등을 구입한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 수사 결과 삼성그룹은 2002년 대선 전 이 채권 가운데 332억 원을 한나라당에 대선자금으로 전달했고 열린우리당에 36억 원을 건넨 것으로 확인됐다. 나머지는 삼성증권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검찰은 당시 발견된 삼성 채권 850억 원어치의 행방 중 상당 부분을 밝혀냈던 것이다.
당시 이 채권을 그룹의 지시에 의해 사채시장에서 구입했던 곳이 바로 삼성증권 관계사인 B 사다. 그러나 채권 매입에 관여했던 삼성과 B 사 관계자들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자 곧바로 해외로 도피했다. 더 이상의 사용처와 자금출처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수사가 끝난 2005년 9월에야 국내에 들어와 검찰에 검거됐다. 검찰은 정치자금법 공소시효인 3년이 종료됐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에 대한 소환조사를 마치고 그해 12월 관련 사건의 수사를 종료했다. 또 과거 파악된 비자금 850억 원의 출처가 이건희 회장의 주식매매 대금이라는 삼성 측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사건은 확대되지 않았고 이 채권을 받은 이회창 전 총재의 측근인 서정우 변호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 안희정 씨 등만이 사법처리됐다.
하지만 검찰은 내부적으로 삼성증권이 구입하고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 김인주 사장 등이 대선 때 정치인에게 건네주었던 채권의 행방을 계속해서 추적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 근거로 검찰이 2005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광재 의원이 삼성 구조본 박 아무개 상무로부터 6억 원의 채권을 받은 사실을 밝혀낸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검찰은 지난 대선 때 노무현 캠프의 기획팀장이었던 이 의원이 박 상무로부터 채권 6억 원어치를 받은 사실이 있지만 정치자금법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사법처리하지 않았다. 검찰은 당시 삼성 측이 관련 수사에 적극 협조해 수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검찰 안팎에서는 이번 압수수색을 계기로 대선자금 수사 때 이미 삼성 비자금 저수지에 대한 수사가 어느 정도 진행됐던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검찰은 삼성증권이 적어도 삼성그룹 비자금의 저수지라는 것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고 특본이 구성되자마자 삼성증권을 압수수색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검찰이 대선자금 수사로 인해 삼성 비자금 계좌와 연결된 삼성증권 계좌의 존재를 이미 알았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렇지 않고서 그렇게 정밀한 압수수색이 과연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검찰은 삼성증권 압수수색을 마친 뒤 가진 언론 브리핑에서 “삼성본관도 압수수색하느냐”라는 질문에 “더 이상의 압수수색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삼성비자금의 중요한 저수지가 삼성증권이며 삼성본관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이미) 삼성본관에는 칫솔만 있을 것”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현재 검찰은 지난번 압수수색으로 확보된 문제의 차명 의심 계좌들에 대한 입출금 내역과 연결 계좌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이 백업파일 보관소인 삼성SDS e센터까지 주도면밀하게 뒤졌던 것도 해당 계좌의 과거 입출금 내역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것. 문제가 되는 계좌의 수년간의 내역을 다 뒤져보겠다는 의도다.
# 향후 검찰 특검의 방향
검찰은 이처럼 압수수색 후 계좌추적으로 삼성그룹 비자금 저수지를 철저하게 파악해서 특검에 넘길 계획이다. 특히 검찰의 압수수색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면 이번 삼성 비자금 수사에서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검찰과 달리 수사 성과를 확실히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될 특검 수사의 특성을 고려하면 향후 파장이 더욱 커질 가능성도 높다. 검찰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이번 수사는 (결국) 장기간의 계좌추적이 승패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이 특검으로 넘어가면 특검은 검찰 계좌추적 자료를 토대로 수사를 할 전망이다. 계좌추적이 필요하기 때문에 특검수사를 위해 검찰에서 상당수 인력이 파견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검은 이 같은 계좌추적을 통해 삼성 비자금의 규모와 출처 그리고 운용 방식을 파악하는 데 우선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차명계좌에 저장된 비자금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가 일차적인 수사의 초점이 될 것이다. 비자금 규모가 파악되는 것만으로도 삼성은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이미 검찰은 지난 대선자금 수사로 850억 원의 괴자금을 파악해놓았다. 이보다 더 많은 비자금의 흐름이 발견된다면 삼성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탈세와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을 수도 있다. 관련 혐의는 형량도 세고 수사결과에 따라 소액주주들의 민사소송이 이어질 수도 있다. 세계적인 초유량 기업인 삼성의 명성에 커다란 타격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삼성 괴자금이 추가로 나올 경우 이 돈이 어디에 사용됐느냐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이미 시민단체 등에서는 삼성 측이 이 같은 차명계좌로 조성된 비자금을 대주주 경영권 방어와 경영권 승계 등에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 김용철 변호사 주장대로라면 이 돈이 바로 ‘떡값’으로 삼성그룹의 로비자금으로 쓰였을 정황도 점쳐진다.
삼성증권의 차명계좌로 인출된 채권과 CD는 이른바 ‘골동품’(발행연도가 오래된 채권)만 아니라면 추적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의 채권 추적 기술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20년 동안 꽁꽁 숨겨놓은 비자금을 찾아낼 정도다. 따라서 검찰 수사에 이어 특검 수사가 예고된 이번 삼성비자금 사건은 향후 파장을 짐작하기 어려운 초대형 후폭풍을 몰고 올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