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흥진 전 경위는 30년 수사생활 동안 조폭과 결탁한 동료를 구속시키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런 그가 지난해 마지막 날 ‘은퇴’를 했다. 정년퇴임을 하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조폭 때문에 바쁘다. 경찰대학을 비롯한 여러 곳에 강력 수사에 관한 강의를 하고 조폭을 주제로 한 몇 가지 책도 구상 중이다. 조폭을 잡아들이는 일은 그만두었지만 그 방법은 계속해서 전수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4일 기자와 만났을 때도 이 ‘영원한 조폭 반장’은 현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배지를 달았던 30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때론 자신이 칼에 찔리기도 했고 조폭과 결탁한 동료를 구속시키는 아픔도 맛보았다. 한국 조폭수사의 산증인 격인 그가 조폭들과 펼쳤던 ‘리얼 느와르’를 소개한다.
안 경위는 98년 강동경찰서에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 가자마자 서장으로부터 강동구 내의 조폭들을 소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조사해보니 관내에는 길동파, 텍사스파, 만두파 세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 텍사스파와 만두파는 이미 잘 아는 조직이었다. 그가 조직 보스에게 “여기서 떠나라”고 전하자 텍사스파는 강남으로, 만두파는 미아리로 자리를 옮겼다. 안 경위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자진해서 ‘이사’를 한 것이다.
하지만 길동파는 달랐다. 안 경위도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봤지만 관내 누구도 정확하게 조직의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알고 봤더니 길동파의 보스가 경찰, 구청 직원, 심지어는 검찰 관계자까지 구워삶고 있었다. 경찰과 구청 직원은 돈으로, 검찰 관계자는 범죄 정보를 흘려주는 방법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지어는 안 경위가 반장으로 있는 팀에도 길동파의 뒤를 봐주는 형사가 있었을 정도였다.
워낙 길동파의 위세가 등등해 피해를 입고 있는 업주들은 이들이 행패를 부려도 쉬쉬할 뿐이었다. 안 경위는 경찰서장에게 직접 “팀을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래도 수사는 진전이 없었다. 길동파의 비리를 부는 사람이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경위는 어렵게 길동파 보스의 범죄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고 그를 바로 잡아넣었다.
바로 그날 안 경위는 오후 5시에 술집 주인들을, 저녁 7시에 노래방 주인들을 경찰서로 불렀다. 그리고 직접 구속영장을 보여주며 “길동파 보스가 구속됐으니 그동안 피해 입은 사실을 신고해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앞 다투어 진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합해보니 금액으로 20억~30억 원, 100건이 넘는 사건이 신고되었다. 결국 길동파 보스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또 길동파와 결탁한 경찰과 구청 직원도 옷을 벗어야 했다.
조폭 수사 과정에서 몸싸움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강력부 형사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 역시 차 트렁크에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항상 넣고 다녔다. 그래도 사고는 종종 일어나게 마련. 검거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리 중앙동파를 검거할 때의 일이다. 한 용의자의 오른쪽 다리에 있던 ‘사시미칼’을 빼앗고 수갑을 채우려는 찰나, 용의자가 왼쪽 다리에서 칼을 빼 휘두른 것이다. 조폭이 양쪽 다리에 칼을 차고 있는 일은 드물어 당하고 말았다. 재빨리 피했지만 엄지손가락 위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고 두 달간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조폭과의 대면에서는 순간의 선택이 목숨을 좌지우지한다. 그가 조치원으로 조폭을 검거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조폭들이 여관에서 자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을 급습하러 갔다. 그는 방문 앞에서 잠시 고민을 했다. 종업원에게 키를 받아서 조용히 열고 들어갈지, 자장면 배달로 가장해서 노크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갈지.
고심 끝에 첫 번째를 선택했다. 방 안에선 세 명의 조폭이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고, 그들을 누워 있는 채로 덮쳐서 검거했다. 그런데 수갑을 채우고 보니 조폭들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깔고 자고 있었다. 만약 문을 부수고 들어갔더라면 그들은 그 소리에 놀라 잠을 깨 칼을 집어들었을 것이다. 열쇠로 조용히 열고 들어간 건 ‘하나님이 보우하신’ 선택이었다.
대개 조폭 보스들의 공통점은 잔인하다는 점이다. 또 이들은 대범하고 머리가 영리하다고 한다. 그런데 조폭 보스들 중 특이한 인물이 있다. 바로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국내 최대 조폭 칠성파의 보스 이강환 씨(66)다.
이 씨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선천적으로 주먹이 약했다고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에게 맞고 다녀서 술집을 했던 어머니의 소원이 아들이 다른 사람을 때리는 일이었을 정도였다는 것. 그런 그가 보스가 된 이유를 안 경위는 “머리가 매우 영리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삼국지>를 서른 번 탐독한 이 씨는 주먹이 센 동생들과 의형제를 맺는 식으로 세를 불려나갔다고 한다.
안 경위는 칠성파가 “6·25 전쟁 때부터 시작된 전통 있는 폭력조직”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부산에 가서 술집 간판을 유심히 보면 별이 일곱 개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칠성파가 관리하는 집이다”라고 귀띔했다.
‘조폭 수사의 대부’인 안 경위의 퇴임 소식이 조폭들에게는 반가운 일일까. 그는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경찰 내에 조폭에 대해 자신만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양쪽을 모두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야 때론 두 조직을 ‘연결’해주는 통로 역할도 해낼 수 있다는 것. 요즘 젊은 형사들은 조폭 수사를 꺼린다고 한다. 위험한 데다 조폭을 ‘이해’하는 일이 자칫 결탁하는 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년퇴임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아내다. 안 ‘경위’는 요즘 “30년 동안 국가에 봉사했으니 이제는 가정에 봉사하라”는 아내의 말을 귀가 따갑게 듣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