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녀는 괴로워> 이미지컷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만남의 매개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돈’이다. 일단 조건만남이 성사되면 남자 쪽에서 상대 여성에게 수억 원대의 대가를 지급하고 동거에 들어가는데 월 수백만 원의 생활비도 따로 지급한다. 역술인이 강조하는 궁합이나 사주도 중개를 성사시키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한다. 부유층 남성들을 설득할 때는 당신에게 ‘액땜’을 해 줄 사주를 갖고 있는 여성이라고 강조하고 여성을 설득할 때에는 ‘당신의 팔자를 펴게 해줄 남자’라고 그럴 듯하게 설명한다.
강남의 일부 부유층들을 대상으로 번지고 있는 조건만남 중매의 실태를 현재 맹활약(?) 중인 한 역술인을 통해 알아본다.
주변에서 ‘한 미모’한다는 평가를 받는 박은희 씨(가명·29·회사원)는 2주 전 황당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역술인’ 서남식 씨(가명·63·남)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서 씨는 1년 전 박 씨의 ‘사주’를 봐준 역술인이었다.
당시 서 씨는 박 씨에게 “남자 운은 되게 좋은데 너무 강해서 계속 남자가 있는 스타일이야”라며 운을 뗀 뒤 “그게 너무 좋다 보니 주변에 남자가 계속 있어. 죽을 때까지 이혼을 해. 결혼해 애를 낳고 살아도 이혼하는 상이야”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던 것.
박 씨로선 불쾌한 기억속의 서 씨가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라 반가울 리 만무했다. 그러나 서 씨는 1년 전과는 딴판으로 “그 좋은 사주를 왜 썩히고 있느냐”며 살갑게 말을 건넸다. ‘이 사람이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궁금증이 든 박 씨는 서울 강남 지역의 한 맥주집에서 서 씨와 두 번째 대면을 했다.
박 씨에 따르면 서 씨는 “사업을 하면 한 달에 1000만 원 이상 벌 수 있는 운인데 왜 이러고 있느냐”고 말을 꺼낸 뒤 “내 고객 중 하나가 부자를 만나 2억 원을 받고 외국에서 잘 살고 있다”며 다름 아닌 “궁합이 맞는 돈 많은 남자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식의 말을 넌지시 건넸다고 한다.
박 씨는 이 같은 제의를 받은 사람이 자기 말고 주변에 또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 씨의 말대로라면 서 씨는 최근 서울 강남의 일부 부유층을 대상으로 조건만남을 중개하는 신종 중매업자가 틀림없었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기자가 만난 서 씨는 의외로 평범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서울의 K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는 서 씨. 그는 한 은행에서 이사까지 지내다 은퇴한 후 역술을 취미삼아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잘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 씨는 “역술 자체는 취미삼아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소득을 올리는 것은 자신의 본업인 ‘역술’이 아니라 ‘역술로 엮는 조건만남’이라고 털어놓았다. 서 씨에 따르면 돈이 많은 남자와 돈이 필요한 여자를 역술로 엮는 데 성공하면 “적게는 300만~500만 원, 많게는 3000만 원”까지 중개료를 받는다고 했다.
서 씨에 따르면 자신이 ‘엮어’ 주는 인물들은 주로 ‘강남’에 빌딩 한두 채쯤은 소유하고 있는 재벌이나 상류층의 자제들이라고 한다. 서 씨가 주로 하는 일은 한 쪽에서 ‘조건’을 내밀면 거기에 맞는 상대를 찾아 주는 일.
여성이 조건을 내걸면 서 씨는 그것을 맞춰줄 수 있는 ‘부자 남자’를 찾아주고 반대로 남자 쪽에서 ‘동거할 여자’를 찾을 땐 자신의 여자 고객 중에서 대상을 찾는다. 처음엔 대부분 ‘동거’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사주와 궁합을 앞세워 설득하면 마음을 돌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서 씨는 자신의 중개 이력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일로 2년 전 한 미스코리아와 한 건설회사 사장 사이에 있었던 일을 꼽았다. 서 씨에 따르면 어느 날 자신의 고객이었던 A 건설 L 사장(유부남·48)이 “자신에게 궁합이 맞는 예쁜 ‘세컨드’ 하나만 구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 서 씨가 자신의 고객 기록부를 뒤져 보고 찾아낸 ‘파트너’는 얼마 전 비슷한 부탁을 했던 미스코리아 K 씨(당시 27세).
K 씨의 조건은 3억 원과 월 500만 원의 생활비. “남의 ‘세컨드’ 노릇하는데 벤츠 한 대쯤은 뽑아야 할 것 아니겠느냐”며 이런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당시 서 씨가 둘을 엮어주는 대가로 보장 받은 ‘중개 수수료’는 3000만 원이었다.
서 씨에 따르면 처음엔 K 씨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성사될 분위기였지만 L 사장이 조건을 흥정하며 K 씨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바람에 일이 틀어져 버렸다고 한다.
한편 서 씨처럼 ‘중매’를 본업으로 하는 역술인은 흔치 않았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역술인은 한두 명 더 있었다. 취재 도중 압구정동에서 만난 역술인 정 아무개 씨(남·52)도 궁합이 맞는 커플을 맺어주는 ‘중개업’을 하고 있었다. 다만 거액의 중개료를 노리고 주로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서 씨와는 달리 선남선녀가 주요 고객이었다. 물론 정 씨도 ‘조건만남’을 중매한 경우는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종로에서 ‘영업’을 하다 신촌에서 신장개업한 김 아무개 씨(여·48)는 사주를 바탕으로 한 궁합보다는 관상을 토대로 한 ‘속궁합’을 주무기로 하는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김 씨는 “‘속궁합’이 좋아야 부부관계든 계약 동거든 잡음 없이 ‘회로’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고객의 관상을 보면 섹스에 강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떤 스타일의 섹스를 좋아하는지를 거의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맺어준 커플들이 다른 커플들보다 중도에 헤어지는 경우가 훨씬 적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강남의 부유층 남자들은 왜 굳이 ‘생면부지’의 여성과 계약동거를 하려는 것일까. 역술가들은 ‘부를 과시하고 쾌락을 즐기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또는 자기 사주팔자에 없는 기운을 보완하거나 도화살 역마살과 같은 ‘살’을 액땜하려는 의도로 동거하는 경우도 있는데 극히 드물지만 배우자의 묵인 하에 동거하는 커플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에서는 서 씨의 경우와 같은 신종 중개업에 대해 마땅한 법 규정이 없어 단속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역술인협회 측에서는 서 씨의 ‘희한한 중매’에 대해 “상식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얘기”라며 서 씨가 역술인협회의 회원이라면 ‘제명’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서 씨는 역술인협회에 가입돼 있지 않았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