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회장. | ||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조사위)는 지난해 3월과 4월, 10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현준호가 소유했던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 땅 2필지와 다른 곳 여러 필지에 대해 ‘조사개시결정’을 했다. 조사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귀속 결정 과정은 ‘조사개시결정→조사활동→국가귀속’ 순으로 진행된다. 첫 단계인 조사개시결정이 내려지면 조사위는 이해 당사자에게 통보하고 법원에 해당 재산에 대한 보전처분을 신청한다.
따라서 현준호 소유였던 이 땅들도 법원에 의해 보전처분이 내려졌다. 조사위 측은 “조사 중인 사안에 대해 알려줄 수 없다”고 밝혔으나 취재 결과 일부 필지에 대한 보전처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요신문>이 찾아낸 학계리 땅 2필지 등기부에는 지난해 4월 23일자로 ‘피보전권리 국가귀속으로 인한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권리자 대한민국, 법률상대표자 법무부장관 김성호, 금지사항 양도 담보권설정 기타 일체의 처분행위의 금지’라고 가처분 내용이 기재돼 있다. 토지대장 확인 결과 이 땅의 소유주는 1924년부터 현준호로 돼 있다가 1983년에 직계후손인 현 아무개 씨 명의로 넘어갔다.
이 땅들의 현 소유주인 현 씨 등은 “현준호는 친일파가 아니다”라며 조사위 측의 조사개시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했으나 기각됐고 조사위는 현재 조사활동(실지조사·자료제출 요구·진술청취·감정의뢰 등)을 벌이고 있다. 조사활동을 통해 친일재산임이 확실해지면 조사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국가귀속이 결정된다. 반대로 실지조사 결과 친일재산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물론 이해당사자는 조사활동에 대한 이의신청을 할 수 있고 최종적으로 행정소송을 통해 땅을 되찾을 수도 있다.
▲ 현준호의 소유였던 전남 영암군 학계리 땅의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본 결과 지난해 4월 이 필지에 대해 법원의 보전처분이 내려졌다. | ||
문제는 그가 1930년대 초 중추원 주임참의가 되고나서부터다. 중일전쟁 발발 후엔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반에 참여해 전남지역을 돌면서 전쟁 지원을 역설하고 비행기도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그는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 포함됐고 결국 친일재산조사위 대상자에도 올랐다. 조사위 관계자는 “현준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조건에 부합돼 조사대상에 올랐고 철저히 법에 따라 진행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현준호 본인은 친일행위와 관련 지난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에서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는 반민특위 조사에서 “중추원 참의 결정 통보를 받고 완강히 거절하다 민족은행인 호남은행을 지키고 일본 고위층을 상대해 조선 사람들에게 유리한 일이 있도록 하기 위해 승낙했다”고 진술했다. 비행기 헌납에 대해선 “호남은행 유지상 필요해 은행이 지불한 것”이라 밝혔고 시국강연에 대해선 “(일본이) 지시한 내용의 강연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준호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당시 광주에 있다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북한군에게 붙들렸고 결국 살해당했다. 그의 셋째아들이 고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이고 현영원 회장의 둘째딸이 바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현정은 회장은 1955년에 태어나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현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임시정부 요원들에게 독립자금을 전하는 할아버지 심부름을 여러 번 맡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현 회장도 할아버지를 항일 인사로 기억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조사활동 중인 현준호의 땅들에 대해 최종적으로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지면 현준호의 친일 논란이 재점화될 듯하다.
한편 현준호가 호남은행을 설립할 당시 조선은행엔 부산상고 출신으로 금융계 회계업무 제1인자라는 평가를 받던 김신석이라는 이가 있었다. 현준호는 그를 스카우트해 최측근이자 동지로 삼았고 그는 호남은행 전무까지 오른다. 한데 김신석도 현준호에 뒤이어 1936년 중추원 참의가 됐다. 이 김신석은 바로 이건희 삼성 회장 부인인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의 외할아버지다. 김신석의 딸 김윤남 씨가 홍라희 관장의 모친인 것.
김신석도 현준호와 마찬가지로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할아버지들의 인연이 80년여 뒤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두 재벌가 여류 인사와 관련돼 더욱 눈길을 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