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원회가 지난해 11월 기흥공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 ||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단체에서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를 구성하고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주장하고 있다. 또 대책위는 “이외에도 여러 건의 백혈병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며 삼성반도체 측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 측은 “백혈병 발생이 반도체 공장 환경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라며 대책위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백혈병 논란,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최근 ‘백혈병 대책위’ 관계자들은 다소 난감한 전화를 받곤 한다. “이번에 삼성반도체 생산직 노동자로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입사해도 되겠느냐”는 문의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이 알려진 이후 이런 문의전화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대책위 관계자들은 이런 문의에 난색을 표명하며 “현재의 상황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취업을 할지 안할지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라고만 대답하고 있다.
삼성반도체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회사다. 그런데 이 회사에 입사하려는 노동자들이 백혈병 걱정을 한다거나 이곳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은 그야말로 ‘완벽한 청정지역’이기에 더욱 그렇다.
백혈병 사건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작년 3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3라인 디퓨전 공정 3베이에서 근무했던 황유미 씨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부터다. 또 황 씨와 같은 라인, 같은 공정에서 일하던 이숙영 씨가 2006년 백혈병이 발병해 두 달 만에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같은 곳에서 함께 근무하던 두 명의 여성 노동자가 같은 병으로 사망하면서 반도체 공장의 환경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증폭됐던 것. 대책위는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화학 물질이 백혈병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경기본부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를 주축으로 대책위가 구성되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제보들이 잇따랐다. 처음 2명이었던 삼성 반도체 백혈병 환자수는 8명으로 늘어났고 현재도 제보는 계속되고 있다. 대책위는 4월 28일, 이 중 4명에 대해서는 집단산재신청을 근로복지공단에 접수했다. 산재신청을 한 노동자들은 황유미, 이숙영 씨 외에 2005년에 사망한 황민웅 씨(사망 당시 31세)와 2005년에 발병하여 현재 투병 중인 김옥이 씨(현재 투병 중·30대 후반) 등이다.
대책위는 삼성 반도체 직원의 백혈병 발병 제보가 이어지자 삼성 측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삼성 측은 대책위의 주장이 과장되었다는 입장이다.
삼성 측이 대책위의 진상규명 요구를 거절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삼성 반도체 직원의 백혈병 발생률이 전체 국민의 백혈병 발생률의 평균 이하거나 적어도 평균 정도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백혈병의 발생 원인이 반도체 공장의 근무 환경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백혈병 발생과 반도체 산업의 인과관계가 밝혀진 바 전혀 없고 발생률 자체도 그리 높지 않다는 얘기다. 삼성 측은 “발생률이 국민 평균보다 높지 않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따로 조사할 계획이 없으며 현재 노동부 산업보건환경팀에서 역학조사를 하고 있으니 결과에 따라서 입장을 정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에게도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환자의 발생 원인을 찾는 일은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황유미 씨의 진료를 담당했던 아주대학교 박준성 교수 역시 “황 씨가 근무 환경 때문에 백혈병에 걸렸다는 심증은 가질 수 있지만 명백한 증거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산업의학전문의들도 “다른 산업에 비해 반도체 산업은 역사가 짧고 이에 관련한 직업병의 연구도 많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노동부 산업보건환경팀 신인재 사무관 역시 “역학조사를 하고 있지만 결과는 올 연말쯤에나 나올 것 같다”며 “하지만 이번 역학조사로 반도체 산업과 백혈병의 인과관계를 완전하게 밝히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신 사무관은 “반도체 산업에서는 우리나라가 선두로 달리고 있는 상황이라 반도체와 관련한 직업병 연구도 국내에서 처음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 측의 주장대로 현재로선 백혈병과 반도체 산업의 인과관계를 밝힐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발생률은 어떨까. 삼성 측의 설명대로 삼성반도체 직원의 백혈병 발생률이 국민 평균 이하거나 평균 정도일까. 산업의학전문의 공유정옥 연구원은 여기에 대해서 삼성 측과는 매우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전체 국민의 백혈병 발생률로 삼성반도체의 경우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백혈병은 주로 20대 이전과 65세 이후에 발생하는 병이기 때문이다.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경우 주로 20~30대 사이에서 발병했는데 삼성 측은 이를 무시하고 전체 연령과 비교했기 때문에 평균 이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데선 흔치 않는 20~30대의 백혈병 발생이 왜 삼성에서만 자주 일어나느냐에 포인트를 맞춰야 한다. 더구나 현재 삼성 측은 백혈병 환자를 8명만 인정하고 있지만 대책위에 제보된 환자는 14명에 달한다.”
지금까지 삼성 측에서 인정한 백혈병 환자수는 7명이다. 애초 8명이었지만 최근 삼성 측은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한 직원이 조사 결과 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전체 백혈병 환자는 7명”이라고 전했다.
삼성 측이 주장하는 7명 중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직원이 6명이고 1명은 온양공장 직원이다. 기흥공장 전체 직원은 2만 7000명이고 백혈병 환자는 1999년부터 2006년 사이에 발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8년 동안 2만 7000명 중에 6명의 백혈병 환자가 발병한 셈이다. 이들 중 5명이 20~34세에 발병했고 1명은 50대에 발병했다. 이 숫자를 연령별 백혈병 발생수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이 숫자는 삼성 측의 주장대로 전체 국민 평균보다도 낮을까.
2005년 보건복지부에서 발간한 <1991-2001 암발생통계> 자료에 따르면 3년 동안 20~34세 남녀의 백혈병 발생수는 인구 10만 명당 7.23명. 이 수치를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전체 직원 숫자인 2만 7000명으로 환산해보면 1.95명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여기에 삼성 반도체의 경우 8년 동안 환자가 발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2만 7000명당 5명 정도라는 얘기. 삼성 측에서 인정하고 있는 20대~30대 초반 직원의 백혈병 발생수 5명 정도에 해당한다. 결국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의 백혈병 발생률은 국민 평균 정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러나 대책위는 백혈병 환자를 14명으로 보고 있는데 계속해서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책위 이종란 노무사는 “제보자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신원을 밝히기 꺼려하고 있다. 또 사망한 경우도 많은데 유족들이 적극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대책위 주장대로 백혈병 환자수가 14명이고 앞으로 계속 늘어난다면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의 백혈병 환자수는 국민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대해 삼성반도체 이승백 부장은 “대책위에서 말하는 14명이라는 숫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므로 신뢰하기 힘들다”며 “현재로선 불분명한 사실을 바탕으로 가정을 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최근 한 달 전에 백혈병이 발병한 삼성반도체 퇴사 직원이 산재신청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되면 삼성 측이 인정할 숫자는 8명으로 늘어난다. 또 대책위의 주장대로 계속해서 신원이 파악되는 환자가 늘어난다면 삼성 측이 말하는 국민 평균 이하 발병률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잃게 된다.
대책위는 백혈병 외에 다른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전·현직 삼성반도체 직원이 더 있다고 주장하는데 작업 중 수많은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대책위 공유정옥 연구원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인 만큼 방어적인 논리를 펼 것이 아니라 근무환경이 발병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밝히는 데 회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산재로 인정되지 않아 백혈병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법적 보상을 못했지만 도의적인 차원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회사 내에 환경안전팀이 상시로 작업 환경과 직원들의 건강에 대해 점검하고 있으며, 역학조사 결과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류인홍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