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에 붙잡힌 박 아무개 씨(55). 박 씨는 자금관리책 류 아무개 씨(50), 알선 및 유인책 이 아무개 씨(44) 등과 함께 각종 사기 행위를 일삼다 체포됐다.
그는 300억 달러(약 33조 원)가 예치된 홍콩 HSBC은행의 위조 예금 잔액 증명서를 만들어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예금의 명목은 미얀마 정부의 투자금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미얀마 지역 개발에 추가적인 투자비용이 필요하다’며 돈을 털어갔다. 그렇게 박 씨가 털어간 남의 돈은 현재 밝혀진 것만 12억 원 규모다.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혹자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저 위조된 예금 잔액 증명서 하나만을 믿고 수억 원대의 투자금을 내놓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 꽤 있다. 무엇보다 박 씨의 사기 행위에는 한국을 넘어 미얀마와 대만을 넘나드는, 세계를 무대로 기가 막히게 짜여진 ‘스토리텔링’이 자리 잡고 있다.
박 씨가 내세운 자신의 직책은 ‘세계지하경제기구 총재’. 다소 허무맹랑하지만 그가 총재를 맡고 있다는 기구는 실제 대만에 존재했다. 박 씨는 피해자들에게 “한국의 IMF 사태는 이 기구의 영향력 탓에 나온 현상이며, 훗날 한국이 이를 잘 수습한 것 역시 해당 기구 때문”이라고 과시했다. 그리고 박 씨는 이 기구가 미얀마 개발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고 속여 사람들의 투자를 끌어냈다. 물론 대만에 존재하는 해당 기구는 박 씨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기구의 성격 역시 그가 말한 지하경제와는 관련이 없었다.
또 박 씨는 미얀마 왕가와 자신의 친분 관계를 과시했다. 현지 투자를 위해 국왕과 공주에 로비자금이 필요하다며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한 것. 이 또한 거짓이다. 박 씨는 실제 피해자 몇몇을 미얀마에 데려가 미리 섭외한 현지인과 자리를 마련하는 세심함도 보였다. 게다가 그는 ‘총재’라는 직책답게 고급 호텔에 투숙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 나갔다.
결국 일확천금을 노린 많은 피해자들이 3개국을 무대로 잘 짜인 박 씨의 스토리에 속아 넘어갔다. 경찰 관계자를 통해 알게 된 후일담이지만, 국제 사기꾼 박 씨는 이미 해당 사건 이전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를 시도하다 한 피해자에게 고소를 당한 상황이었다. 박 씨는 앞선 피해자와의 합의금을 마련하기위해 이 같은 국제 사기를 기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카자흐 발전소사업 사기사건’의 주인공인 W 사 이 아무개 대표는 사업설명회 현장에 현지 국무총리(오른쪽) 등을 초청해 사기극에 이용했다.
박 씨의 사례는 국제 사기의 전형이다. 그리고 서울 강남 곳곳엔 이런 박 씨와 같은 국제 사기꾼들이 지금도 맹활약(?) 중이다. 언뜻 봐선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지만, 앞선 박 씨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의 사기엔 사람의 흥미를 묘하게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이 큰 힘을 발휘한다. 국제 사기꾼 대부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기본적으로 이들 사기의 배경이 되는 무대는 동남아와 구소련 국가 등 아직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일종의 ‘미지의 세계’다. 종목은 자원과 개발, 부동산, 금괴, 구권 및 채권 등이 주를 이룬다. 그들의 설명만 듣고 보자면 <인디아나 존스> 같은 어드벤처물을 보는 듯하다. 온갖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지만 아직 아무도 기회를 잡지 못해 태생 그대로 머물러 있는 그 어떤 곳처럼.
일례로 최근 경찰에 검거된 한 국제 사기꾼은 저개발국가 캄보디아를 무대로 삼았다. 명목은 캄보디아 ‘땅 분양 사업’. 캄보디아는 최근 인도차이나 국가 중 가장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지역이다. 최근엔 코리아타운이 형성될 정도로 한인들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놓고 볼 때, 문제의 사기꾼이 내세운 땅 분양 사업은 누구나 혹할 만했고, 피해자를 양산했다. 하지만 실제 캄보디아는 공산국가로서 모든 땅은 국가 소유다. 애초부터 땅 분양 사업은 기가 막힌 스토리텔링에 감춰진 사기 아이템이었을 뿐, 실체조차 없었던 것이다.
몽골의 자원 사업을 내세웠던 또 다른 국제 사기꾼의 사례는 전설로 통한다. 이 사기꾼은 몽골의 한 특정 지역을 가리키며 “여기 땅을 슬쩍 걷어내기만 해도 석탄이 쏟아져 나온다. 현지선 투자비용과 기술이 없어서 개발을 못했을 뿐 ‘노다지’나 다름없다”고 사람을 꾀어냈다. 물론 실제 그런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토리 속 주인공인 사기꾼 대부분은 현지의 왕가 혹은 정부 지도자들과 무척 가까운 사이로 포장한다. 또 나아가 그중 일부는 포장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 현지의 권력자들을 꾀어 내 자신의 사기극에 이용하기도 한다. <일요신문>이 1017호와 1043호를 통해 두 차례 보도한 W 사의 ‘카자흐 발전소건설 사업 사기사건’의 사례도 그런 경우다. W 사 대표 이 아무개 씨는 당시 실제 자신의 사업설명회에 현지의 국무총리와 한국의 주 카자흐 외교관들을 초청해 사기에 이용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지능범죄 수사를 해온 한 경찰관은 이렇게 설명했다.
“국제 사기의 맹점은 여건상 현지 실사가 어렵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아이템을 제안하는 기획자의 말만 믿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혹자는 ‘확인도 어려운 사업에 어떻게 투자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거꾸로 보자면 아무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기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소위 말하는 아이템이 좋고 스토리만 탄탄하면 어느 누구나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예상외로 피해자들의 연령층은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현재 사기 의혹 속에서도 전국을 무대로 급속도로 확장 중인 T 사는 그 대표적 사례다. 아직까지 실체가 불분명한 뉴질랜드의 한 법인이 운영 중이라는 T 사의 주 종목은 ‘환차익 거래 상품’이다. 다단계 방식과 결합, 투자금을 댈 회원들을 모집해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다. 앞서의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국제 사기와 비교한다면 파급력과 규모 면에서 월등하다. T 사는 뉴질랜드 현지인들을 직접 한국으로 초청해 사업설명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영업신고도 없고 회원 수당 외에 실질적인 배당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현재로선 국제 사기의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자 화폐’라는 상품으로 투자자 모집에 나서고 있는 A 사 역시 현재 국제 사기 의혹을 받고 있는 조직이다. 역시 외국에 본부를 두고 있다는 A 사 관계자는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전자 화폐는 신용카드처럼 전 세계에서 통용될 예정이며 어느 곳에서나 사용할 수 있다. 지금은 선행 판매 중이며 훗날 많은 차익을 남길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람을 꾀고 있다. 점점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 전자상거래의 환경을 빙자해 그럴듯하게 포장한 국제 사기 아이템인 셈이다. 현재 A 사는 다수의 투자자를 끌어 모으고 있어 수사당국이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국제 사기는 점점 진화하고 영역을 확장하고 있지만, 해당 범죄 유형의 특징 탓에 수사의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제 사기 범죄자들 중 상당수는 문제가 터질 타이밍에 맞춰 해외 본거지로 출국해 잠적을 한다는 것이다.
앞서의 경찰은 “사기사건의 경우 피해 금액이 크지 않을 경우, 가해자 구속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당사자 간 조사가 선행돼야 하지만 가해자가 해외로 출국할 경우 무척 난감해진다”며 “국제 사기 본거지 대부분은 개발도상국들이다. 수사를 포함해 행정 체계가 대부분 잡혀있지 않은 국가들이기 때문에 범죄자 인도 협정이 있어도 국내로 혐의자를 불러들이기란 하늘의 별따기”라고 지적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