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 KBS 여의도 본관 앞에서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는 시민들이 촛불을 밝히고 있다. ‘정연주 사장 퇴진’을 주장하던 KBS 노조 측은 일단 촛불민심과 발맞춰 강경태도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이런 가운데 KBS 본관 앞에서는 ‘공영방송 지키기’를 외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가 특별감사와 세무조사를 통해 정 사장을 퇴진시키고 KBS를 장악하려 한다”며 “정연주 사장의 퇴진 반대, 정부의 공영방송 장악 반대”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현재 KBS와 관련해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의견 차이는 KBS 사내에서도 노정되고 있다. “정부가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국세청과 감사원을 동원해 표적 세무조사와 표적 감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는 뜻을 같이하지만 ‘정연주 사장의 퇴진’ 문제에 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
왜 이들은 ‘공영방송 지키기’라는 목표에는 동의하면서도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KBS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진상을 파악해보았다.
연일 계속되고 있는 KBS 본관 앞 촛불집회에서는 “KBS 노조는 어용노조”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의 전방위적인 방송 장악 시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오직 정연주 사장 퇴진만을 주장하는 건 결국 정부의 입맛에 맞는 사장을 앉히려는 의도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국언론노조 KBS 지부(이하 KBS 노조)는 이러한 촛불집회가 잘못된 시각에서 출발됐다고 전한다. 노조 측은 이미 성명서를 통해 “이번 시위는 PD협회가 신문에 낸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KBS를 지켜달라’는 내용의 광고로 촉발됐다”며 “정 사장을 둘러싼 일부 사내 정치 세력들이 편향된 정보를 제공해 순수한 촛불의 의미를 오도하려 한다. 이는 결코 가볍게 봐 넘길 수 없는 사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KBS 노조 김성진 총무국장은 “노조는 정연주 사장의 퇴임 문제보다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투쟁에 목숨을 걸 것이다”라면서도 “그렇다고 낙하산 인사로 선임된 사장과 낙하산 인사 반대 투쟁을 함께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촛불집회의 ‘배후’로 거론되고 있는 PD협회는 시민들의 공영방송 사수 운동에 대해 노조와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14년차 PD 이 아무개 씨는 “신문광고는 PD협회 회원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낸 것이라 문제될 게 없으며,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시민들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분들이 고맙다. 퇴근할 때 촛불을 들고 있는 시민들을 보며 무척 부끄러웠으며 그래서 몇 번 집회에 참석했다”라고 말한다. 이어 “정부의 압박이 강도 높게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조가 정 사장의 퇴진만 외치는 것은 정말로 공영방송 사수 투쟁을 할 마음이 있는지 의심할 만한 대목이다”라고 덧붙였다.
KBS 노조는 최근뿐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정 사장의 퇴진에 목소리를 높였다. 노조는 그 이유를 부실경영과 편파적인 방송 때문이라고 전했다. 정 사장의 선임은 노무현 정부의 코드 인사였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노조 측은 최근 정 사장이 퇴진해야 할 이유가 더 확실해졌다고 말한다. 노조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정 사장은 현 정부와 어떠한 소통도 없고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말하자면 자리만 지키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면 빨리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PD협회 관계자는 “현 정부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결국 MB 계열의 사람 아니겠나.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는 노조가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냐”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연주 사장의 퇴진이 먼저다”는 노조의 주장과 “공영방송 사수 투쟁이 더 시급하다”는 PD협회의 주장은 KBS 내 여론을 대변하는 두 가지 큰 조류다. 이렇게 사내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KBS 사내 게시판에는 이와 관련된 성명서와 입장 등이 연일 올라오고 있다.
실명을 밝히길 꺼린 KBS 직원 박 아무개 씨는 “여러 가지로 뒤숭숭한 분위기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보면 현 정부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 이에 대해 사내 의견이 양분되어 있어서 걱정스럽다. 또 현 사장이 퇴임하고 새로운 사장이 오면 구조조정이 일어나 자리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하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KBS 기자협회는 두 가지 주장에 대해 찬반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478명의 기자들을 상대로 지난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현 상황에서는 정 사장의 퇴임을 촉구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53.9%였고 “적절하다”는 입장은 37.8%로 나타났다.
KBS의 한 기자는 “여론 조사 결과대로 기자들 사이에서는 노조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좀 더 높으며 PD들은 기자들보다 반대 여론이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또 그는 “만약 정 사장이 퇴진을 하게 되면 2~3주 만에 새로운 사장이 선임될 텐데 그 짧은 시간에 낙하산 인사를 막을 수 있겠냐”고 덧붙였다.
KBS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노조가 그동안 조합원들의 신뢰를 많이 잃은 것으로 보인다”며 “그동안 선거 당시 공약으로 내걸었던 조합원들의 임금인상이나 복지 증진에 관련해 뚜렷한 성과가 없었던 터라 조합원들의 노조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최근에 촛불집회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는 시민들과 대결하는 모습을 보이자 등을 돌리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KBS의 이 아무개 PD는 “KBS는 정부가 아닌 시청자, 즉 국민을 위한 방송인데 노조가 시민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상황에 난감해 하는 조합원들이 많다. 나도 최근에 노조를 탈퇴할까 하다 미워도 버리지는 말자는 생각에 탈퇴하지는 않았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KBS 노조 측은 조합원들의 불만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고 여긴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노조에 대한 불신이 있다면 그건 ‘정연주 사장 퇴진 투쟁을 왜 더 힘 있게 하지 못하냐’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정연주 사장의 퇴진과 관련 여러 가지 주장이 얽혀 있지만 그렇다고 KBS 조합원들이 정 사장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PD협회 관계자들 역시 “정 사장의 퇴진보다 더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가 발등에 떨어졌기 때문에 퇴진에 반대하는 것이지 결코 그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노조가 “투쟁의 우선 순위를 공영방송 사수 쪽에 두겠다”고 밝혀 그동안의 투쟁 전략을 전환하는 것 아니냐는 주목을 받고 있다. 노조는 지난 19일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정치 독립적인 사장 선임 제도화 투쟁을 본격화하는 데 최우선의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밝힌 것. 이에 대해 노조 관계자는 “정 사장 반대, 퇴진 요구라는 조합의 기존 입장에는 결코 변화가 없으나 현 시기에서 투쟁의 우선 순위를 낙하산 사장을 반대하고 정치 독립적인 사장을 선임하기 위한 ‘국민참여형 사장선임 제도’를 만드는 데 두겠다는 의미다”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국민참여형 사장선임 제도는 방송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대의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아이디어일 뿐이며 앞으로 투쟁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PD협회 관계자들은 “진정성에 의심이 가지만 앞으로 정말 공영방송 사수 투쟁을 행동에 옮긴다면 참여를 안할 이유가 없다”고 밝히며 “노조의 이번 발표가 잠깐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만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덧붙였다.
KBS의 뜨거운 감자인 정연주 사장의 퇴진 문제가 촛불 정국과 얽히면서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결론이 날지는 아직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