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6일 KBS 본관에서 열린 입장 표명 기자회견에서 감사원의 해임 요구 처분 결과를 비판하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정연주 전 사장 해임에 감사원과 검찰, 경찰이 모두 달려든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방송통신위원회까지 나서 중간광고 허용을 조건으로 방송협회에 정연주 전 사장 해임에 대한 협조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정부의 끈질긴 작업 때문일까 결국 정 전 사장은 해임됐고 검찰에 체포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정 전 사장의 해임은 이제 1라운드를 막 끝낸 것에 불과하다. 정 전 사장은 이번 이사회의 해임이 적법하지 않다며 법적 소송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정 전 사장의 배임 혐의에 대해서도 사법부의 판단이 남아있다. 어쩌면 정 전 사장과 이명박 정권의 한판 승부는 지금부터인지 모른다. 해임과정에 있었던 치열했던 싸움과 앞으로 이어질 법정공방을 미리 짚어봤다.
⊙ 왜 정연주인가
정연주 전 사장 해임에 대해 극명하게 찬반이 엇갈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이념 대립과 그 궤를 같이한다.
정 전 사장은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출신으로 진보적인 성향의 인사다. 2003년 취임 때부터 보수진영에게 ‘코드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2003년에 송두율 교수 관련 다큐멘터리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야권으로부터 편파방송을 주도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보수정치인들과 보수언론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 사장은 2006년 연임에 성공했다. 당시 KBS 노조가 정 전 사장의 연임에 반대하자 그는 정문이 아닌 지하주차장을 통해 출근하는 웃지못할 풍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나라당 인사들은 정권교체하면 KBS 사장부터 물갈이를 하겠다는 식의 발언을 자주 내뱉어왔다. 결국 정권이 교체된 이후 정부에서는 정부 기관을 총동원해 정연주 전 사장 해임작업을 본격화했다. 결정적으로 정 전 사장은 지난 쇠고기 파동에서 KBS가 정권의 논리를 대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보수 진영의 호된 질책을 들어야 했다.
⊙ 방통위도 한몫(?)
정연주 전 사장의 해임에는 국세청, 검찰, 감사원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됐다. 감사원은 KBS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일사천리’로 진행해 KBS의 방만경영을 지적했고, 국세청은 외주제작사에 대한 세무조사로 KBS를 압박했다. 검찰은 수사 인력의 상당수를 투입해 정 전 사장에 대한 유죄 입증에 매달렸다.
물론 생각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사정기관에서는 정연주 전 사장 아들의 삼성전자 입사와 관련해 청탁이 있었는지부터 그의 판공비 지출 내역까지 정 전 사장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조사했으나 흠이 될 만한 사안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정부는 이사회를 통한 사장 교체라는 마지막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러한 로드맵도 지난 4월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방송통신업무를 소관하는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시중)도 외곽에서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방통위 고위간부가 방송협회 측에 ‘KBS 사장 교체에 협조하면 지상파 방송의 중간광고를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일종의 딜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방통위 측은 “정연주 전 사장의 해임 문제는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며 그런 제안이 있었다는 것은 소설 같은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 김인규 전 KBS 이사. | ||
정 전 사장의 해임에 주도적으로 나선 것은 검찰이다. 검찰은 정 전 사장을 ‘배임’으로 기소할 방침이다. 검찰은 정 전 사장의 배임으로 KBS가 2000억 원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정 전 사장의 배임혐의를 입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지만 과연 정 전 사장이 의도적으로 배임을 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KBS는 국세청을 상대로 낸 7건의 소송에서 ‘국세청은 법인세 1990억 원의 부과를 취소하라’는 1심 판결이 난 뒤 항소심에서 조정권고를 받아들여 556억 원만 돌려받았다. 이것이 정 전 사장의 배임행위에 해당하느냐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재판부는 2005년 10∼11월 양측에 556억 원에 합의토록 하는 조정권고안을 제시했고 KBS는 이를 수락했다.
문제는 행정법원의 조정권고가 민사재판의 조정과 달리 판결과 같은 효력이 없다는 점이다. 조정권고는 행정법원이 사법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제도로 양측이 동의할 경우 원고가 소를 취하하고 피고 측에서 새로운 행정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것은 임의적인 합의에 불과해 법원이 구속력을 담보할 수 없고 양측이 법원에 제출한 합의서 외에 이면계약을 맺더라도 제재가 불가능하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양측이 물밑합의를 마친 뒤 법원에 조정권고를 요청한 것으로 보고 이 부분을 집중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통상적인 배임행위와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배임행위의 경우 회사가 손실을 보고 누군가가 이득을 취하는데 이번엔 이득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인 국가가 이득을 본 셈인데 이 경우를 과연 배임으로 봐야 하느냐에 대해선 검찰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정 전 사장을 배임혐의로 몰아가기에는 아직 2% 부족하다는 데 검찰의 고민이 있다. 검찰이 양측의 물밑합의 부분에 대해 수사를 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에게 임면권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지만 ‘임명권자’에게 ‘임면권’도 있다는 것이 상당수 법학자들의 판단이다.
⊙ KBS의 앞길은
정연주 전 사장의 해임 이후 KBS는 어떻게 될까. 일단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후임 사장을 빨리 임명하는 것이 수습의 지름길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물망에 오르는 이사 중 가장 유력한 인사는 김인규 KBS 전 이사다. 김 전 이사는 이미 3월부터 내정됐다는 설이 있었다. 본인도 KBS 사장 자리를 강력히 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명박후보선대위 방송전략실장을 지낸 김 전 이사를 사장 자리에 앉힐 경우 ‘낙하산 인사’ ‘보은인사’라는 비판이 나올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정 전 사장 해임 후 직능단체 인사들이 위주로 되어 결성된 KBS 사원행동 관계자는 “KBS 이사회가 경찰력을 불러들여 공영방송을 유린한 지난 8일의 폭거가 있은 지 불과 1주일 만에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구현할 낙하산 사장을 영접하기 위해 내달리고 있다”며 “이사회의 모든 행위는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사장 공모 절차 접수 마감 시점인 20일까지는 공모를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특히 이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언론특보이자 KBS 출신인 김인규 씨가 후임 사장에 응모한다면 즉시 이에 상응하는 본격 투쟁 계획을 선언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