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영받지 못한 외출 2003년 황장엽 북한 전 노동당 비서(가운데)가 미 국무부 소속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 미국 워싱턴 인근의 레이건 내셔널 공항의 입국장을 빠져 나가고 있다. 당시 방미는 정부의 강한 반대 속에 이뤄졌다. 연합뉴스 | ||
<일요신문>의 확인 결과 황 전 비서는 늦어도 올해 안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것으로 보인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현재 한국과 미국이 황장엽 전 비서에 대한 비자 발급에 합의했으며 이에 따라 황 전 비서가 전자여권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의미가 큰 인사의 외국방문은 양국간 합의 하에 이뤄지는 것이 관례다.
황 전 비서는 지난 2003년 미국 민간단체인 ‘디펜스 포럼’의 초청으로 미국에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방문은 정부의 강한 반대 속에서 이뤄진 것이어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또한 미국 방문을 마친 이후에는 한번도 우리나라를 벗어났던 적이 없었다. 때문에 황 전 비서는 이후 지인들에게 외국에 자유롭게 다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여러 차례 피력했으며 정권교체 후 여러 루트를 통해 방법을 타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는 대북관계 등을 고려해 황 전 비서의 운신의 폭을 제한해왔다. 황 전 비서가 워낙 거물급 인사여서 북한으로서도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써왔을 뿐 아니라 북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있는 인사이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황 전 비서가 보수적 성향의 미국 부시정부 인사들을 만나는 것이 달가웠을 리가 없었던 탓이다. 1997년 김영삼 정권에서 한국으로 망명할 당시 황 전 비서는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고 북한을 해방시키겠다”고 말할 정도로 북한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활동을 할 뜻을 내비쳤으나 정권교체 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켜왔다.
황 전 비서는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쳤으나 정부는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그의 방미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라이트코리아연합 등 보수단체 등에서는 “김영삼 정부 시절 황 전 비서가 망명할 때 부총리급의 예우와 모든 정치활동을 보장했으나 DJ·노무현 정권은 황 전 비서에 대한 외부 접촉을 제한하는 등 공개적 활동을 방해해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한 “심지어 병이 나도 친지와 의사의 방문까지 허용하지 않아 옥중 생활 이상의 인권침해를 자행해왔다”며 “황 전 비서는 사실상 연금상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민간간체인 ‘디펜스 포럼’은 황 전 비서의 방미를 적극 추진했고 결국 정부도 그의 미국 방문을 허가했다. 때문에 지난 2003년 미국 방문은 그 자체로 많은 화제거리를 낳았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 방문이 성사되면서 일각에서는 황 전 비서의 망명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황 전 비서의 여권 발급에 관여했던 외교통상부 여권과 관계자는 “2003년 당시 논란이 많이 있었기는 했지만 결국 여권발급이 됐다”며 “하지만 당시 발급됐던 여권은 1회만 사용 가능한 단수여권이었으며 이후로 황 전 비서가 따로 여권을 신청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황 전 비서와 함께 망명했던 김덕홍 전 여광무역 사장은 복수여권을 받았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황 전 비서의 거취를 둘러싼 상황도 바뀌었다.
일단 대북문제에 관심이 높은 미국 정부에서 그의 방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특히 조만간 있을 미국 대선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북한 인권문제에 단호한 대처를 주장하는 공화당 측에서 황 전 비서의 방미는 호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외교소식통 등은 보고있다.
국내에서도 10년 만에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대북 인권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미 여당 내에서는 ‘북한인권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실제로 18대 국회에서 이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도 높아보인다.
▲ 1997년 황장엽 전 비서(왼쪽)가 측근인 김덕홍 씨와 함께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대북 인권 문제에 대해 가장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지닌 황 전 비서의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마다할 리 없다. 지난 정권과 달리 오히려 황 전 비서를 통해 북한 인권문제를 더욱 호소력 있게 국제사회에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황 전 비서는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현 정부와의 사이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 전 비서의 방미를 위한 상황이 무르익으면서 지난 7월 보수단체 관계자들은 황 전 비서에 대한 인권탄압을 중단하고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시위를 외교통상부 앞에서 벌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배경들 때문에 현재 한국과 미국 양국이 황 전 비서의 미국 방문을 추진하게 됐다는 것이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같은 움직임이 황 전 비서에게 직접 전달됐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황 전 비서도 미국 방문을 위해 지난 8월 25일부터 신청받기 시작한 전자여권을 이미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황 전 비서의 여권을 발급해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경우 복수여권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황 전 비서가 그토록 소원하던 자유로운 입출국이 이뤄질 날도 멀지 않은 것.
황 전 비서의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번 기회를 계기로 황 전 비서의 활동이 자유롭게 된다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보다 본격적인 문제제기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황 전 비서가 위원장으로 있는 북한민주화위원회 측은 황 전 비서의 방미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황 전 비서의 방미가 이뤄지면 지난 2003년 당시 안전상의 이유로 무산됐던 활동들을 보다 활발하게 펼 가능성이 높다. 당시 황 전 비서의 방미에 대해 한국과 미국 정부는 개인적인 방문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또한 방미 일정 자체도 양국 경호요원들의 철저한 경호 속에 진행돼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황 전 비서가 상원 청문회에 나서서 북한 인권에 대해 증언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그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들로 미뤄보아 방미가 성사되면 황 전 비서는 미국 의회 청문회 출석 등 대북인권문제 제기에 앞장설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럴 경우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각에서는 이번 방미를 계기로 지난번 방미 때처럼 망명 가능성을 다시 제기하기도 하지만 정권도 바뀌었고 황 전 비서 스스로가 망명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만큼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
늦어도 올 가을쯤 있을 황 전 비서의 미국행은 현 여권에겐 상당한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정보기관 관계자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보수세력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황 전 비서의 행보가 몰고올 파장에 벌써부터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