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은 거액의 자금과 조폭, 사채, 청부살인, MBA 출신 금융전문가 등 관심을 끌 만한 요소들이 두루 등장하고 있고 수사가 진행되면서 미심쩍은 부분이 발견되는 등 그 파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이 씨가 거액의 자금을 과연 단독으로 조폭에게 빌려줬겠는가 하는 부분과 조폭에게 물린 이 씨가 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조폭을 동원한 채무자 살해를 궁리했다는 점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 사건은 2006년 중순 대전 사거리파 출신의 박 아무개 씨(38)가 그룹 회장의 자금을 관리해오던 전 재무팀장 이 씨에게 접근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평소 이 씨와 친분이 있는 측근으로부터 이 씨가 재벌그룹 회장의 개인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박 씨는 이 씨에게 접근, “사채업과 사설경마, 부동산 재개발 분양사업 등에 투자하면 단기간에 큰돈을 벌 수 있다”고 꼬였다. 박 씨의 말에 솔깃해진 이 씨는 이자수익을 기대하고 자신이 맡아오던 회장의 돈 중 일부를 박 씨에게 건넸다. 이 씨는 그해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투자금 명목으로 박 씨에게 총 180억 원을 건네줬다.
하지만 회장 몰래 투자수익을 보려던 이 씨의 야심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초 얘기와 달리 박 씨는 이자는커녕 원금상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수차례 독촉했지만 빌려준 자금 중 80억 원을 돌려받지 못하자 이 씨는 회장 몰래 자금을 운용한 사실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졌다.
다급해진 이 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지난해 5월 모래내파 조직원 정 아무개 씨(37)에게 3000만 원을 착수금조로 주고 박 씨를 살해해달라고 부탁했다. 살인 청부를 받은 정 씨는 친구 2명과 함께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오토바이 ‘퍽치기’를 위장해 둔기로 박 씨의 머리를 때려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그러자 이 씨는 또 다른 조직폭력배 윤 아무개 씨(39)에게 3억 원을 주고 또 다시 박 씨 살해를 의뢰했고 윤 씨는 지난해 7월 동료와 함께 박 씨를 납치해 전북 익산의 한 아파트에 감금했으나 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이 씨로부터 모든 사정을 전해 듣고 살인청부를 받았던 정 씨와 윤 씨 등이 태도를 확 바꾼 것이다. 이 씨의 약점을 잡은 이들은 오히려 “살인 청부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이 씨를 협박해 총 11억 8000만 원을 뜯어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상이 경찰이 발표한 수사결과다. 경찰의 발표대로라면 이 사건은 자금 관리인 이 씨의 욕심이 빚은 사고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는 부분들이 있다.
첫째 수백억 원에 달하는 재벌 회장의 개인자금을 회사 간부가 관리해 왔다는 점이다. 회장이 아무리 이 씨를 신뢰했다고 해도 부장급에 불과한 이 씨에게 200억 원이란 돈을 선뜻 맡겼다는 점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 이를 오랫동안 방관하고 있었다는 점도 의문이다. 더구나 2002년에 입사한 이 씨가 회장과 오랜 시간동안 깊은 신뢰를 쌓아온 최측근 인사라고 보기도 어렵다.
둘째 MBA 출신인 이 씨가 조직폭력배에게 속아 거액의 이자수익을 기대하고 비정상적인 투자를 시도했다는 점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씨가 조직폭력배를 쉽게 믿었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는 투자를 이 씨가 단독으로 결정했다는 점도 그렇다.
셋째 이 씨가 살인청부를 한 이유도 석연치 않다. 돈을 돌려받지 못하자 박 씨를 살해하려했다는 점은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룹 회장 모르게 이 씨 단독으로 돈을 유용한 것이 맞다면 적어도 이 씨로서는 원금을 돌려받기 전에는 채무자가 없어져서는 안되는 상황이다.
두 차례나 살해당할 위기에서 박 씨가 살아남은 것과 관련, 경찰은 박 씨가 ‘이 씨를 협박하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조폭들을 설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두 번째 살인청부를 부탁받은 윤 씨는 박 씨를 감금했다가 오히려 ‘나를 살려주면 20억 원을 주겠다’는 박 씨의 말에 회유를 당해 풀어준 것으로 전해진다. 또 조사결과 청부살인을 시도한 정 씨와 윤 씨 등은 녹취록 등을 근거로 이 씨를 거꾸로 협박해 각각 3억 8000만 원과 8억 원을 챙겼고 자신이 청부살해의 대상이 됐음을 알게 된 박 씨 역시 이 씨를 협박, 도피자금 등의 명목으로 4억여 원을 받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넷째 이 씨가 박 씨를 살해하기 위해 조폭을 끌어들인 부분도 석연치 않다. 궁지에 몰린 이 씨가 ‘조폭을 잡기 위해서는 조폭이 가장 적절하다’는 단세포적인 생각을 한 데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소위 잘나가는 대기업 간부였던 이 씨가 조폭들에게 거꾸로 협박을 당할 가능성이나 골치아픈 사후문제 등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이 씨는 이미 한 차례 박 씨에게 투자금 중 거액을 떼이는 등 조폭에게 뒤통수를 맞은 상태였다.
실제로 경찰에서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이 씨가 돈을 떼어 먹혀서 박 씨를 살해하려 했다기보다는 박 씨 등이 돈의 출처에 의심을 표시하자 이를 막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이번 사건과 관련 지난 24일 이 씨를 협박해 돈을 뜯어낸 조폭 4명과 이 씨를 상대로 투자사기를 벌인 박 씨를 구속했다. 그리고 ‘도주의 우려가 없고 살인교사 동기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 씨에 대해서도 보강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씨가 어떻게 조직폭력배들과 접촉했는지도 미스터리다. CJ 측은 이번 일이 퇴직한 직원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로 회사와는 무관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씨가 관리해온 자금에 대해서도 CJ 측은 “선대 회장으로부터 증여받은 개인재산으로 회사 공금과는 무관하다”며 비자금 의혹에 대해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상속세를 내지 않던 회장의 개인자금이 실명전환된 시점이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시점과 비슷한 때로 알려지자 “경찰 수사 때문에 차명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정황상 경찰은 일단 이 씨가 유용한 돈이 회장 개인 돈일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돈이 오랫동안 차명계좌로 관리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 자금의 성격 및 조성 경위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씨는 살인교사 혐의에 대해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폭력배인 정 씨와 윤 씨가 대가를 바라고 “사기당한 돈을 찾아주겠다”며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대기업 회장의 개인자금을 둘러싸고 조폭들이 얽히고 설킨 이번 사건은 과연 이 씨 혼자서 벌인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그룹 회장의 향후 대응도 주목된다. 사건은 자칫하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일각에서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