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전 회장. | ||
이날 재판에 언론의 관심이 모아진 것은 두 사람의 오랜 인연 때문이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1999년 대우그룹 퇴출 저지를 위해 조풍언 씨를 로비스트로 고용했으나 이 로비는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 김 전 회장은 해외로 도피, 기나긴 은거생활을 해야 했다. 반면 조 씨는 로비 대가로 김 전 회장 소유의 대우정보시스템 주식을 헐값에 사들여 이득도 봤다. 절친했던 두 사람의 운명은 대우그룹 부도를 기점으로 한 사람은 수배자로, 다른 한 사람은 최고 무기중개상의 길로 나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공개적인 재판장에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쳤다. 어쩌면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았을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조우했던 그날의 법정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경기고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대우그룹이 부도위기에 내몰린 지난 1999년 처음 만나 김우중 전 회장이 조풍언 씨에게 대우그룹 퇴출을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조풍언 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조 씨는 특히 군부와 관련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 김대중 정권에서 ‘얼굴없는 실세’로 통했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은 이처럼 조 씨가 김 전 대통령과 친분이 두텁다는 것을 알고 부도 일보 직전에 놓인 대우그룹을 살리기 위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조 씨를 통해 로비를 시도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바람과는 달리 대우그룹은 끝내 부도를 맞았고 이후 김 전 회장은 해외에서 장기간의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반면 로비를 맡았던 조 씨는 로비가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의 실력자로 여전히 막강한 위세를 떨치게 된다. 오히려 김 전 회장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대우정보시스템 주식을 헐값에 사들여 부를 축적했다.
이렇게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됐던 두 사람이 결국 대우그룹 회생로비 사건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면서 법정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조 씨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귀국하지 않고 있다가 정권교체 후인 지난 3월 일시 귀국했는데 곧 바로 검찰에 의해 출국금지됐었다. 조 씨의 신병이 확보되면서 지난 2005년 조 씨가 국내에 없다는 이유로 종결됐던 대우그룹 회생로비 수사가 3년 만에 재개됐고 김 전 회장도 다시 수사기관과 법정을 오가기 시작했다.
김 전 회장은 <일요신문>이 보도한 것처럼(857호) 한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루머가 나올 정도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이날 재판에 참여했다. 연록색 수의를 입은 조 씨도 수척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70세가 넘은 고령의 조 씨는 지난 5월 구속수감돼 5개월이 넘도록 구치소 생활을 하고 있다.
▲ 조풍언 씨. | ||
예상대로 재판에서 김우중 전 회장은 시종일관 조풍언 씨를 원망 섞인 눈초리로 쳐다봤고 조 씨는 김 전 회장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날 재판의 하이라이트는 대우그룹 로비와 관련해 김 전 회장이 조 씨에게 돈을 준 것이 대가성인지를 묻는 검찰의 신문에 대한 김 전 회장의 대답이었다.
김 전 회장은 “돈을 처음에는 (조풍언에게) 순수하게 줬다가 관리할 수 있냐고 물어서 ‘해주겠다’고 해서 시작됐다”며 “처음엔 순수하게 했는데 나중엔 욕심이 났는지… 로비자금 뭐 이런 거보다 돈이 들어온 다음에는 (조풍언의) 얘기가 조금씩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전 회장은 조 씨를 향해 “모든 것을 당신이 해 놓고는 미국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와 이제 와서 내게 뒤집어씌우려 한다”며 분노를 토해냈다. 하지만 조 씨는 끝내 김 전 회장의 질책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김 전 회장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날 재판의 또 하나의 관심사는 김 전 회장의 돈이 조 씨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홍걸 씨에게 흘러들어갔느냐는 것이었다.
검찰은 김 전 회장에게 “조 씨에게서 대우정보시스템 주식 30%를 김 전 대통령의 아들 홍걸 씨에게 줘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느냐”고 질문했고 이에 김 전 회장은 “그렇다”고 인정하고 “승낙했느냐”는 다음 신문에도 “그렇다”고 답했다.
김 전 회장은 그러나 조 씨의 소개로 김홍걸 씨를 만난 적이 있느냐는 변호인 측의 질문에 “없다”고 답했으며 “조 씨에게 큰 기대는 안했고 대우에 도움된 게 없다”고 말했다.
결국 김 전 회장의 증언대로라면 조 씨는 대우그룹이 공중분해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김대중 대통령 일가와의 친분관계를 내세워 김 전 회장에게 접근해 이득을 챙긴 셈이 된다.
한편 검찰 일각에서는 향후 수사의 초점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조 씨의 아내 이덕희 씨에게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덕희 씨는 전직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로 이름을 날린 바 있으며 현재 미국 내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검찰이 미국에 있는 이 씨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수사할지는 미지수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