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도공사의 일부 지역 디젤 기관차에 유사경유가 공급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사진은 새마을호가 용산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지난 9월 초 한국철도공사(이하 철도공사)의 수도권 일부 지역 경유 저장소에서 유사경유가 대량으로 발견돼 공사 측이 자체 조사를 벌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 결과 공사 측은 유사경유가 SK에너지 측에서 공급된 사실을 확인하고 검찰에 SK에너지를 고소했다.
하지만 SK에너지 측은 공장 생산과정에서는 절대 유사경유가 나올 수 없다며 수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동안 일반 주유소가 개인들을 상대로 유사경유를 팔다 적발된 사례는 많았으나 항공 철도 등 대형 소비처에서 사용하는 제품에서 유사경유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사경유 문제로 정유업체가 직접 고소당한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특히 이번 사건은 수많은 승객을 실어나르는 기관차가 한때나마 유사경유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고 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위험한 장난을 친 것일까. 철도공사와 SK에너지 간에 벌어지고 있는 유사경유 소송전 내막을 살펴봤다.
철도공사에서는 현재 새마을호, 무궁화호 등 디젤 엔진을 사용하는 기관차의 연료로 경유를 사용하고 있다. 철도공사 서부권 지역에서 사용하는 양만 해도 하루에 40만 리터에 달한다. 철도공사는 지난 6월 1일부터 서부권에서 사용하는 경유를 SK에너지에서 공급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난 9월 5일 서울시가 대형 석유제품 사용처에 대한 일제 점검을 벌인 결과 철도공사의 서부권 동부 지사 및 대전 지역에 보관 중인 석유가 유사경유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6월부터 9월까지는 국제 석유값이 폭등해 국내에서 유사경유나 유사휘발유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다. 특히 일반 주유소에서는 가정용 보일러 등유를 경유로 속여 팔거나 다른 물질을 혼합해 팔다가 경찰에 적발된 사례가 허다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대형 소비처에서 유사경유가 발견된 것은 철도공사가 처음이었다. 기관차가 유사경유를 사용할 경우 윤활성이 약해져 엔진 내구성이 떨어지고 심할 경우 운행 중 엔진이 멈출 수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관차에 사용되는 경유가 유사경유 제품으로 드러나자 깜짝 놀란 철도공사 측은 전국적으로 자체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수도권 및 대전 지역에서도 유사경유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추가로 확인했다. 철도공사에서 확인한 양만 해도 250만 리터.
유사경유는 SK에너지에서 공급받은 제품에서만 발견됐다. 다른 정유회사의 제품에서는 단 한 건도 유사경유가 발견되지 않았다. 철도공사는 이번 사건으로 100억 원 가까운 금전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철도공사는 SK에너지를 석유 및 석유대체 연료사업법 위반으로 대전지검에 고소했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유사경유가 이처럼 대량으로 철도공사 측에 유입될 수 있었을까. 혹시 철도공사 내부 직원이 비싼 경유를 내다팔기 위해 일부를 빼내고 다른 것을 섞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검찰은 수사 결과 철도공사의 저장소는 구조상 일단 수송차량으로부터 경유가 들어가면 내부 직원이 이를 임의로 빼내거나 다른 물질을 섞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원인은 공장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든지 아니면 수송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든지 둘 중 하나인 셈이다. 이에 대해 SK에너지 측은 “공정 과정에서 그런 제품이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며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SK 측은 수송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SK의 한 관계자는 “경유 수송은 모두 외부 업체에 외주를 주고 있다”며 “수송과정에서 문제가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부 공정 과정에서 유사경유가 제조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의 말처럼 수송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라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피해자가 철도공사 하나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SK에너지 측에서 나온 다른 경유제품도 유사경유로 둔갑해 주유소 등으로 공급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무렵 주유소 등에서 말썽이 됐던 유사제품들과 관련성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할 대목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SK 관계자는 만약 수송과정에서 생긴 문제라면 다른 곳에서도 유사경유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철도공사 측도 이번 사안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정확한 사실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채 알려질 경우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수사를 의뢰했다고 철도공사 측은 밝혔다.
하지만 철도공사 측은 어찌됐든 이번 사건은 SK에너지 측에 분명한 잘못이 있다는 입장이다. 철도공사 구매팀 관계자는 “그게 공장에서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수송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는 수사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분명한 것은 저장소에 넣는 순간까지의 책임을 SK에너지 측에서 지는 것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SK에너지 측의 잘못”이라고 못을 박았다.
현재 검찰에서는 철도공사 관계자들을 불러 경위를 조사하는 한편 품질연구원 측에 성분분석을 의뢰해 정확히 어떤 물질이 섞였는지 분석 중이다. 이미 상당 부분 유사경유를 소비한 철도공사 측에서는 기관차 엔진에 손상을 주는 ‘불순물’이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이 점은 SK에너지 측도 마찬가지다. 유사제품이라 하더라도 문제될 만한 성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기업 이미지에 미칠 타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