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전설적인 주먹들로는 김두한 시라소니 이정재 조일환 김태촌 백민 조양은 조창조 안상민 박복만 등이 꼽힌다. 일세를 풍미했던 이들 주먹들의 삶과 그들에 얽힌 일화들은 늘 화제다.
그러나 주먹이라고 다 같은 주먹은 아니다. 개중에는 깡패 양아치 조폭도 있다. 요즘엔 구분이 애매해졌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주먹은 약자들을 괴롭히는 양아치나 조폭과는 다른 의미다. 이권에 얽매이지 않고 약자들을 괴롭히지 않은 일종의 ‘협객’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최근엔 이런 류의 주먹은 그리 많지 않다. 주먹세계도 의리와 낭만이 사라지고 돈과 실리에 따라 쫓고쫓기는 냉혹한 세태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전설로 남아있는 과거의 주먹들과 암흑가를 움직이며 살아있는 보스들은 누구이며 또 누가 양아치고 누가 깡패일까. 최근 출판된 <신동아> 조성식 기자가 쓴 <대한민국 주먹을 말한다>(동아일보사)는 주먹세계의 계보를 정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주먹…>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을 발췌해 소개한다.
“오, 아우 왔느냐.”
“형님, 잘 계셨습니까.”
저자는 2001년 2월 청송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태촌 씨를 면회한 첫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자임을 숨기기 위해 김 씨의 부인을 통해 미리 짜놓은 각본에 의한 인사말이었다. 양은이파, OB파와 더불어 20여 년간 국내 암흑가를 주름잡았던 서방파 김태촌은 칼과 조직력으로 한국 주먹계의 판을 새로 짠 인물이다. 특히 신민당 전당대회장 각목사건(1976), 김태촌 비망록 사건(1990), 슬롯머신사건(1993) 등은 김 씨와 정치 권력층의 유착관계를 드러낸 대표적 사건들로 그의 위력을 과시하는 데 한몫했다.
2001년 접견 당시 김 씨는 검찰 수사와 관련, 자신의 이름이 수시로 언론에 오르내리자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신이 달라졌음을 강조했다. 특히 김 씨는 카지노 대부 ‘전낙원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사건 관련설’과 ‘조용기 목사 아들 이혼 개입설’ 등 과거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경기 주먹계의 실세 박복만에 대한 얘기도 있다. 안양 주먹계의 강자로 꼽히는 박 씨는 170cm가량의 단신이었지만 드럼통을 연상케하는 탄탄한 하체가 돋보였다. 프로복서 출신인 박 씨는 안양시 보디빌딩협회 부회장을 맡아 생활이 어려운 권투선수들을 후원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26세 때 타이거파를 물려받은 박 씨는 1993년 6월 범죄단체 수괴혐의로 구속, 6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다. 실력이 좋은 데다가 넉넉한 인품 탓에 유독 따르는 아우들이 많은 박 씨는 현재 가톨릭 신자로 엄연한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서울에서 100여 명을 동원할 수 있다고 알려진 서울 주먹계의 실력자 백민에 대한 얘기도 뺄 수 없다. 해병대처럼 짧은 머리에 우락부락한 인상을 지닌 백 씨는 계보상 김태촌이 그의 보스지만 정신적인 보스는 조일환이라고 한다.
주먹계 모임인 정도형제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 씨는 178cm에 105kg의 거구로 유술 8단, 격투기 7단, 합기도 8단 등 무술 공인단증을 갖고 있는 ‘공인고수’다. 1980년대 이후 김태촌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 백 씨는 1990년 이후 대선 때마다 개입해왔다. 1992년 대선 때는 김대중 후보 진영의 사조직동우회에 가입, 50여 명의 동생들을 이끌고 선거운동을 지원했고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를, 2007년 대선 때는 이명박 후보를 도왔다.
백 씨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동생들이 저지른 잘못까지 다 안고 간 김태촌 씨는 진정한 보스”라고 말해 김태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현재 백 씨는 동생들과 사업을 할 뿐 조직생활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자들의 진정한 개과천선이 어렵다는 것을 빗대 검찰은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검찰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깬 사례가 안토니파 보스였던 안상민 씨다.
1999년 출소한 후 낙향, 충남 서산에 정착한 안 씨는 조직생활에서 과감히 손을 씻고 ‘새 삶’을 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1980년대 서울 종로와 명동 및 강남 일대를 주름잡던 안토니파의 보스였던 안 씨는 맞장(일대일 승부)으로는 패한 적이 거의 없는 당대 최고의 주먹이었다. 안 씨는 1980년대 중반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방탄유리가 장착된 벤츠500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1992년 10월 그가 청송교도소에서 출소할 당시 관광버스 3대와 승용차 30대가 교도소 앞에서 줄지어 서 있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 씨는 ‘조직생활로 모은 더러운 돈은 받을 수 없다’는 아내의 ‘구박’에 과감히 과거를 청산했다. 현재 안 씨는 화려했던 과거를 잊고 서산에서 아내의 이불가게를 도우며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낯선 이름인 양길모에 대한 얘기도 흥미롭다. 충청지역 주먹 출신 사업가 모임인 충우회를 이끌며 지역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활약하고 있는 양 씨는 충청 주먹계의 차세대 리더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충우회는 창립 초기 검찰의 집중적인 내사를 받기도 했지만 문제없는 친목단체로 인정받았다. 실제로 충우회는 장학사업과 소년원 재소자 교화사업, 학교폭력 추방 등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충우회의 준법성을 강조한 양 씨는 “수사기관에서 자주 전화를 하거나 행사장에 찾아오는 등 항상 감시를 하는 바람에 곤란할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나이든 주먹들의 선도기능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양 씨는 조일환과 조창조를 좋은 본보기로 거론하기도 했다.
1975년 1월 2일 일명 ‘사보이호텔’ 사건을 일으켜 호남주먹의 기린아로 부상한 조양은에 대한 얘기도 자세히 실려있다. 그중 1995년 3월 조 씨가 15년 만에 출소했을 당시에 대한 에피소드가 눈길을 끈다. 조 씨의 출소 소식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이슈였고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출소 직후 잠적한 조 씨를 찾는 데 혈안이 돼있었다. 저자도 여기에 동참, 우여곡절 끝에 조 씨가 서울대병원 특실에 입원해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조 씨의 측근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저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조 씨의 측근이 전해준 말은 이랬다.
“조 기자가 병실에 찾아왔을 때 말이야. 우리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아? 다른 조직에서 보낸 칼잡이가 아닌가 싶어 순간적으로 탁자 밑으로 손이 갔다고. 탁자 밑엔 칼을 넣어뒀거든.”
김두한의 마지막 후계자로 수많은 후배 주먹들로부터 ‘정신적 리더’로 추앙받는 천안곰 조일환에 대한 일화도 재미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살됐을 때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뜻에서 부하들과 함께 손가락을 자른 일명 ‘단지사건’으로 유명한 조 씨는 그 후 신사참배와 교과서 왜곡, 독도망언 등에 대한 항의 표시로 두 차례 더 단지시위를 벌여 현대 주먹사에서 ‘우국지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짙은 눈썹과 솥뚜껑만 한 주먹을 갖고 있는 그는 젊은 시절에는 불같은 기질로 유명했으나 현재는 넉넉하고 후덕한 인품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특히 조 씨는 평소 ‘주먹 활용론’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주먹세계를 떠난 후에도 “주먹은 밤 세계의 질서를 잡아줄 수 있는 필요악이다. 주먹계 전체를 범죄꾼으로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온 조 씨는 신앙에 귀의, 2008년 11월 25일 천안에서 선교목사 안수를 받고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대구가 낳은 걸출한 주먹 조창조에 대한 얘기도 흥미롭다. 시라소니 이후 맨손 주먹싸움의 1인자로 꼽히는 조 씨는 자신을 둘러싼 전설 같은 일화들에 대해 “나이 들고 하니 전국에서 인정해주는 것일 뿐”이라는 말로 겸손해했다. 자신의 지난날은 ‘부끄러운 일들’이라는 것. 조 씨는 이 시대 최고의 건달로 부산 칠성파 보스 이강환을 꼽았다. “아랫사람 다루는 법과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난 천상 보스”라는 것의 그의 평이다.
저자는 조 씨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평생 특정 조직을 거느린 적이 없으면서도 주먹계의 대부로 인정받은 것은 한국 주먹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다. 2007년 11월 수많은 주먹이 몰려든 그의 칠순잔치는 시라소니의 적통인 맨손주먹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고별연이었는지 모른다”라고.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