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11일 1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김현희 씨. 사진공동취재단 | ||
좀처럼 소식을 접하기 어려웠던 김 씨가 다시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KAL기 폭파사건’의 진실에 대해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 규명을 해야 한다는 유족들의 요구가 있으면서부터다. 하지만 김 씨는 이들의 요구에 한 번도 응하지 않았으며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요신문>은 김 씨를 만나기 위해 지난 2004년부터 전담기자를 통해 김 씨의 행적을 추적해왔다. 그 결과 타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근황들을 김 씨 지인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당시 김 씨를 취재했던 <일요신문> 기자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김현희 씨의 지난 10년간의 피난생활을 되짚어봤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 씨는 1990년 3월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확정됐으나 보름 만에 특별사면 됐다. 이후 안보 관련 외부 강연과 수기(手記) 출간 등 왕성한 공개 활동을 해오다 1997년 결혼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은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정권이 넘어가던 시기와 일치한다.
김 씨는 종적을 감춘 이유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북관계를 중시하던 김대중·노무현 정권 입장에서는 북한을 자극할 수도 있는 김 씨의 활동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고, 이것이 김 씨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김 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다구치 씨의 아들인 이즈카 고이치로 씨가 보낸 편지를 받지 못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한국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보니 받을 수 없었다”며 지난 몇 년간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그는 1997년 5월 전국 공안검사를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죗값을 치를 때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같은 해 신변보호를 담당했던 전직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직원 정 아무개 씨와 결혼했다. 이후 김 씨는 서울과 시댁이 있는 경북 일원을 오가며 2000년 아들, 2002년 딸을 출산하는 등 사회에 적응해 간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시댁인 경주에서 성묘를 가는 모습이 모 일간지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의혹도 다시 불거져 나왔다. 언론이 재차 그를 주목했다. 2003년 하반기 한 방송사가 자택과 친척집 등을 오가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자 같은 해 11월 중순 이후 김 씨는 잠적했다. 이때 김 씨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 측은 “우리는 절대 주소지를 노출한 적이 없었는데도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히 주소지를 알고 찾아왔다. 이것은 결국 현 정부의 국정원에서 유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라며 국정원에 의심에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후 그는 완전히 잠적했다.
▲ 88년 안기부에서 기자회견하는 모습과 95년 강연과 책 출판 등으로 바쁠 당시의 김현희(왼쪽부터). 맨 오른쪽은 1997년 결혼 사진이다. | ||
그러나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랜 수소문 끝에 지난 2005년 중반 <일요신문> 기자는 어렵사리 김 씨 남편의 형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부친께서 돌아가신 날 동생(김 씨 남편)이 잠깐 얼굴을 비추고 돌아갔다. 제수씨(김현희)는 장례식에 왔는지 안 왔는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부친 생전에는 가끔씩 전화도 걸려 왔지만 장례식 이후로는 도무지 연락이 되질 않는다”며 “기자들이 자주 시댁을 찾아오니까 아예 가족과 전화 연락하는 것조차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일요신문>은 계속된 취재 도중 호적등본을 통해 김 씨의 이름이 김현희에서 김○○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했다. 이름을 바꾼 시기는 호적상으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지난 90년 사형수에서 특별사면된 이듬해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에 취적 신고를 내면서 동시에 이름을 변경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 씨의 본적으로 기재된 서울 S동 X번지도 등기부등본상 존재하지 않는 주소였다. 정부에서 김 씨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게 철저히 신경썼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지난 97년 12월 28일 결혼한 김 씨는 곧바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결혼 2년 4개월 뒤인 2000년 4월 1일에서야 정식 부부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요신문>은 2005년 김 씨 남편의 형과 만난 후 몇 개월 뒤 김 씨의 실제 거주지 주소를 밝혀냈다. 김 씨와 김 씨 남편인 정 씨의 주소지가 서로 달랐다. 김 씨는 개명한 김○○ 명의로 주소지가 서울 이촌동 ○○○아파트로 되어 있었다. 남편 정 씨는 서울 회기동의 한 다세대주택으로 주소가 등록돼 있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주소지에 살고 있지 않았다. 주소지만 등록해 놓은 채 김 씨는 곳곳을 옮겨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 당시 김 씨 주소지인 이촌동 아파트의 소유자는 서울 강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김 아무개 사장이었다. 김 사장은 지난 99년 4월 이 아파트를 매입했다. 그렇다면 김 씨가 이 아파트에 전세자로 입주해 있어야만 행정상 문제가 없지만 이 아파트의 실제 거주자는 김 사장의 모친이었다. 김 사장의 모친은 “6년째 여기서 나 혼자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파트에는 김 씨의 바꾼 이름 ‘김○○’ 앞으로 각종 우편물이 배달되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현재도 김 사장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국정원의 전직 관계자는 “김 사장은 정보기관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남편 정 씨의 주소지인 회기동 다세대주택에도 <일요신문> 취재진이 꾸준히 방문했었으나 정 씨를 만날 순 없었다. 그도 실제 거주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이곳에도 정 씨의 우편물은 계속 배달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주소지가 다른 것으로 확인된 후 <일요신문>은 불화설을 접할 수 있었다. 김 씨 자신이 결혼하기 직전까지 가족같이 믿고 따른 대상으로 알려진 지인 A와 B 씨는 본지 기자에게 조심스럽게 김 씨의 근황에 대해 들은 얘기를 전했었다.
“두 사람은 우리 집에 함께 오기도 했다. 그때 정 씨는 김 씨의 경호를 담당한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여성스러움을 갖고 있는 김 씨에 비해 정 씨는 좀 맞지 않았다.”(A 씨)
“두 사람은 성격적으로 너무 달랐다. 예를 들면 김 씨는 뭔가를 만지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할 정도로 아주 깔끔하고 여성스럽다. 반면 정 씨는 투박한 스타일이다. 둘 다 서로 무뚝뚝하고 말도 없다. 그래서 처음엔 참 놀랐다. 아무래도 업무 관계상 두 사람이 같이 다닐 수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던 것 같다.”(B 씨)
이 때가 2006년 말이었다. 김 씨는 남편과의 불화와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도 접할 수 있었다. A 씨는 “나와 자주 왕래하고 연락할 때만 해도 김 씨에게는 출판에 따른 인세와 강의료 및 기타 도움 등으로 수억 원대의 제법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 씨는 당시 유가족들에게 ‘잘못을 조금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도록 희생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쓸 수 있게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이 돈은 장학재단을 만드는 데 쓰이지 못하고 그냥 유족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이 없었기 때문에 김 씨의 경제적 어려움은 더 컸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
이후 김 씨의 소식은 완전히 끊겼고 정형근 의원이 2006년 8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김현희 씨는 지금 자녀들 문제 때문에 상당히 고민하고 있다”며 “그는 현재 경기도 서쪽 접경 변두리에 살고 있고, 외출할 때도 얼굴을 안 나타내려고 하는 것으로 안다”고 근황을 전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결국 김 씨는 지난 10년간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피난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권 교체 후 받은 ‘무언의 압력’ ‘신분 노출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어려움’ ‘남편과의 불화설’ ‘자식교육에 대한 걱정’ 등으로 김 씨는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동안 제기됐던 성형수술설도 이같은 맥락에서 불거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름을 바꾼 그가 ‘외모까지 바꾼다면 보다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는 항간의 추측이 성형수술 소문으로 와전됐다는 것.
김 씨는 지난 11일 기자회견 후 또 다시 종적을 감췄다. 김 씨에 대한 취재요청이 쏟아지고 있지만 국정원에서도 묵묵부답이다. 그녀가 언제 또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정치권 일각에서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이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조작됐다’는 진술을 강요했다”는 김현희 씨의 주장을 밝히기 위한 청문회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그녀는 또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설 가능성은 없지 않다. 그녀의 행적과 입이 다시 주목되는 이유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