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칼럼니스트 후카자와 마키(深澤眞紀)가 2006년 칼럼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 ‘초식계 남자’는 이성관계의 경우 양처럼 온순하게 여성에게 접근하는 스타일이다. 여자 쪽에서 싫다고 의사표시를 해도 포기하지 않고 돌진하는 ‘육식남’과는 달리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다. 연애가 주는 즐거움보다 그것을 포기해서 얻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계 게임회사에 근무하는 이 아무개 씨(27)는 스스로를 ‘초식남’으로 인정한다. 그는 연애에 투자하는 시간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취미생활을 하고 스스로를 가꾸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둔다. 여자와 ‘친구’로 지내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연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한눈에 반해버려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을 만큼의 인연, 혹은 내 사생활을 터치하지 않고 만나줄 마음 넓은 여자가 아니면 함부로 연애를 시도하지 않는 것뿐이죠.”
취미가 비슷해 여자 대학동기와 편하게 친구처럼 자주 만나 이야기도 하고 영화도 봤다는 이 씨는 이후에 그 여자동기가 좋아한다고 고백해 크게 당황한 적이 있다. 그녀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자주 만나고 영화까지 봤느냐”고 따지자 오히려 “왜 그럴 수 없느냐”고 되묻고 싶었다고.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는 조 아무개 씨(여·26)는 “초식남이 별종이 아닌 일종의 ‘트렌드’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도 초식계 남자들이 확실히 늘었다는 결론에 이를 때가 많다. 조 씨가 다니는 은행에도 초식남 스타일의 직원들이 점점 늘고 있단다. 특히 최근 신입사원들의 경우 초식남의 비율이 전에 비해 더욱 높다는 것.
조 씨와 같은 팀인 29세의 한 남자 동료는 언제나 말끔한 옷차림에 늘 친절하고 조용하다. 담배나 술은 가까이하지 않고 회식자리에도 여간해선 참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은 성실하고 똑 부러지게 해내기 때문에 단체 활동에 빠진다고 눈총을 받지는 않는다. 현재 여자친구가 없지만 그렇다고 연애에 목말라 하지도 않는다고.
조 씨는 “초식남들은 사고방식이 유연해 여직원들하고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편이지만 가끔 외로워 보일 때도 있다”며 “남자 직원들은 대놓고 티는 안 내도 초식남을 썩 좋아하진 않는 듯하다”고 말했다.
게임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배 아무개 씨(29)는 최근 ‘초식남 자가 테스트’를 해봤다.
배 씨는 “몇 가지 문항에서 평소 모습과 일치해 초식계에 가깝다는 생각은 한다”며 “이기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자기애’가 많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고 강조했다.
그가 자신을 초식남이라고 인정한 부분을 소개하자면 일단 술을 잘 마시지 않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 애인이 없지만 ‘자발적인 솔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입는 것을 싫어한다. 트렌드에도 민감한 편이다.
성실하긴 하지만 큰 야심은 없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로서의 여자도 주변에 꽤 많다. 배 씨는 “자기관리나 외모에 투자하는 것을 즐기다 보니 여자들한테 호감을 사서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는 경우도 제법 있다”며 “남자들은 ‘개인주의’에 대한 평가가 인색해 (초식남 스타일을) 반기지 않지만, 크게 상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초식남들은 확실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어진 개인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열중할 수 있는 특별한 취미나 자기계발의 투자로 활용한다. 파티 플래너로 일하는 유 아무개 씨(34)는 일 외에도 남다른 취미 생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흑인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듣는 경지를 뛰어넘어 직접 가사를 쓰고 랩을 하고 리코딩을 한다. 장비는 물론이고 실력이 프로 못지않다. 오랜 세월 갈고 닦은 결과다.“주말은 대부분 리코딩 작업을 하면서 보내죠. 너무 열중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울 때도 있어요. 춤과 음악을 좋아해 클럽에도 자주 가고요.
일과 연애 외에도 즐거운 것들이 너무 많은데 굳이 남들 하는 것처럼 얽매여 살 필요 있나요?”
시간이 날 때면 크게 음악을 틀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그는 전형적인 ‘초식남’이다. 이러한 초식남의 증가에 대해 후카자와 마키는 그들의 성장 배경을 이유로 들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살 필요가 없었고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성실함만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것.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적인 상황도 일본과 비슷하다. 요즘 젊은 남자들 중에는 어렵고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기보다 원하는 것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희생과 치열함이 아닌 ‘편함과 실용성’에 중점을 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려는 남자들이 증가한 것이 우리나라 초식남 증가의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남녀 역할이나 친분관계에 고정관념이 없고 남녀평등을 쉽게 받아들이는 초식남들은 여자들에게는 애인이건 친구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반면에 그들을 리더십이 부족하며 조직문화를 해칠 수 있다는 등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부류도 적지 않다. 특히 초식남의 상사에 해당할 수 있는 중년 남성층이 그렇다.초식남들은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또 다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일본의 <아가씨 같은 남자, 초식계 남자가 일본을 바꾼다>의 저자 우시쿠보 메구미(牛窪惠)에 따르면 자기애가 강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은 초식남들이 새로운 시대의 소비 스타일을 선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일본의 닛산자동차는 스피드나 파워보다는 ‘편하고 기분 좋은 공간’을 강조한 콘셉트카를 선보여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는 것.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점차 늘고 있는 초식남은 90년대 초반 유행했던 ‘X세대’처럼 앞으로 트렌드나 경제적인 관점에서 점차 주목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