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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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 공화국 - [마지막회] 계파갈등
[일요신문] 문민정부 이후 지금까지도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에게는 ‘소통령’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가 문민정부 2인자로, 국정농단의 배후로 거론되며 비난받은 것은 비단 김영삼 전 대통령(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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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12] YS는 못 말려
[일요신문]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한국 정치사에 가장 화제를 몰고 다닌 정치인이었다. 최연소이자 최다선(9선) 국회의원이었음은 물론, 통영중학교 재학 시절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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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11] 제15대 대선
[일요신문] 1997년 제15대 대선은 좀처럼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에 맞선 신한국당 잠룡들의 경쟁, ‘준비된 대통령’임을 강조하고 마지막 도전에 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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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10] IMF 외환위기 후폭풍
[일요신문] 문민정부 초반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80%를 훌쩍 넘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임기 말 그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추락하고 만다. 이런 급격한 지지율 하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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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9] 한보 사태
[일요신문] ‘변화와 개혁’을 표방했던 문민정부의 위상은 1997년 1월 한보그룹의 부도로 급격히 추락했다. 재계 서열 14위인 한보그룹의 해체는 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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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8] 대통령 비자금
[일요신문] 5·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은 한 국회의원의 폭로가 도화선이 됐다. 1995년 10월 16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태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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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7] 역사바로세우기
[일요신문] 1995년. 파란의 해였다. 문민정부 2인자를 자처했던 JP(김종필 전 총리)는 집권여당을 떠나 자유민주연합을 세웠고 DJ(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지방선거 이후 정계 복귀를 선언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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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6] 신한국당 탄생과 15대 총선
[일요신문] 지방선거 참패 후 집권여당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자유민주연합의 탄생으로 충청과 영남의 지지가 크게 줄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지지율은 30%대로 내려앉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태풍 제니스 상륙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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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일요신문] 1995년 전면 실시된 지방자치제, 그리고 그에 따른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한국 정치사에 적잖은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6월 지방선거는 문민정부 3년차에 치러지면서 중간평가 성격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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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4] 인사파동
[일요신문]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의 인사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이는 또한 인복이 많은 정치인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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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3] 금융실명제·재산공개
[일요신문] 문민정부의 하나회 숙정이 인적개혁이라면 제도개혁의 꽃은 금융실명제였다. 안정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김영삼 대통령(YS)이었지만 이 두 가지만큼은 반격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다. 금융실명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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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 [2] 동숭동팀·광화문팀 실체
[일요신문] 문민정부 초반 개혁 과정엔 베일에 싸인 이름이 하나 등장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대권 책사로 활동한 동숭동팀을 이끈 전병민 실장이다. 전 실장의 동숭동팀은 1992년 대선 전략을 기획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