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수사 결과 이 사건은 황당한 거짓말로 업자들을 속인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벌인 한 사람의 사기극이었던 것. 문제는 고위 인사의 이름 앞에 상당수 업자들이 의심조차 않은 채 돈을 찔러 주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는 류아무개씨(48). 그는 평소 전 청와대 경호실장인 안아무개씨(현재 복지부 산하 단체장)와 친분이 깊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그러던 류씨가 안씨의 이름을 들먹이며 본격적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부터였다. 그가 처음 사기를 친 대상은 자신의 내연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던 이아무개씨였다.
당시 류씨는 이씨에게 정·재계 실력자와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졸부행세를 하던 류씨는 실상 사채빚에 쪼달려 부인이 아파트 청소부로 일하는 처지였다.
경찰 조사결과 류씨는 처음부터 이씨를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류씨가 안아무개씨와 깊은 사이인 것처럼 꾸미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군복무 시절 대대장 지프를 운전한 경험이 있는 그는 어느날 TV에서 청와대 경호실장인 안아무개씨가 군 출신임을 알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주변에 떠벌렸다. 물론 주변 사람들도 그런 류씨의 말을 별 의심없이 인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도 그는 동창생이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한다는 얘기를 줄곧 해왔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류씨는 2000년 11월 빚독촉에 시달리자 주방장 이씨에게 “광주, 전남지역 군부대에 돼지고기를 납품하는 입찰이 있다. 납품건이 성사되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마침 돈벌이를 궁리하던 이씨는 류씨의 말에 혹했다. 군부대에 돼지고기를 납품하게 되면 고정적인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즉시 사업계획서를 작성했고, 류씨가 요구한 로비자금 1천5백만원까지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류씨는 이씨가 준 사업계획서를 불에 태워버린 뒤 로비자금으로 받은 돈은 유흥비로 써버렸다.
그후 류씨는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 거짓말을 계속 지어냈다. 이씨에게는 “지금 심의가 진행중이다. 형님(안아무개씨)에게 얘길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며 무마시켰다. 이씨가 다시 진행상황을 문의하자 류씨는 “로비자금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조금만 더 돈을 달라”며 추가로 돈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기극은 커지기 시작했다. 로비자금이 점점 불어나자 이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박아무개씨(39)도 끌어들였다. 대리운전기사였던 박씨는 “군부대에 돼지고기를 납품하는데 자금이 모자라니 같이 한번 투자해서 떼돈을 벌어보자”는 이씨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박씨는 동료 세 명에게 사업제안을 했고, 이들은 신용카드 대출과 친척들을 동원해 만든 2천만원을 류씨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소식이 없자 이씨 등은 류씨를 찾아가 상황을 물었다. 그때마다 류씨는 “부대가 감사기간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올 것이다”며 달랬다. 은밀하게 진행되는 군납로비의 특성 때문이라는 류씨의 감언이설에 이씨 등은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한 채 속앓이만 했다.
눈먼 돈을 가로채는 데 맛들인 류씨는 이후 돈이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핑계를 만들어 이들로부터 돈을 긁어냈다. 지난해 6월 류씨는 이씨 등에게 “형님이 국방부의 오아무개 장군을 통해 이 사업권을 따내려 하고 있다. 마침 국방부에서 체육대회를 하니 이번 기회에 우리가 확실하게 쏴주면 사업권을 따는데 도움이 된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씨 등은 또 1천만원을 류씨에게 건넸고, 나중에 류씨는 “오 장군에게 전화를 받았는데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라”며 그럴듯하게 말했다.
사기극이 시작된 지 3년이 흐른 올해 초 류씨는 안아무개씨가 복지부 산하 단체장으로 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 이씨 등에게 “형님이 곧 청와대를 그만두고 기관장으로 갈텐데, 이제 일이 성사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실제로 얼마 뒤 안아무개씨의 보직변경 사실이 매스컴을 통해 나왔고, 이를 본 이씨 등은 류씨를 더욱 신뢰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류씨의 거짓말은 그 신빙성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업자 선정에 대해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씨 등은 류씨의 거짓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이씨는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 그동안 준 돈을 돌려달라”며 류씨를 압박했다.
그러자 류씨는 좀 더 그럴듯한 사기극을 꾸미기 시작했다. 지난 9월경 노숙자에게 5천원을 주고 안아무개씨인 것처럼 이씨 등에게 전화를 걸도록 했다. 물론 류씨는 노숙자가 전화를 걸 때 발신자번호가 뜨지 않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러나 4년간 류씨의 말만 믿고 기다려온 이씨 등은 더 이상 그를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류씨는 이씨 등을 피했다. 그즈음 대리운전기사인 박씨 등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사실 확인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박씨 등은 류씨의 사기극에 휘말린 것을 알게 됐고, 4년 동안 진행된 류씨의 거짓말행진은 종지부를 찍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한 관계자는 “군납업체의 뒷거래를 조사하는 과정에 전직 청와대 경호실장이 개입된 의혹이 제기돼 부담스러웠다. 중졸 출신인 류씨가 신문기사 등을 연구해 가며 4년간 철저하게 주변을 속인 치밀함에 놀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한편 주방장 이씨를 통해 투자에 참여했던 대리운전기사 박씨는 동료 세 명으로부터 투자비를 끌어모으면서 일부를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 ‘새끼 사기’까지 벌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