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초등학생 2명의 납치 피살사건의 충격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경기 포천에서도 여중생 피살사건이 발생했다. 경기도 포천 D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엄아무개양(15)은 지난해 11월5일 실종된 이후 연락이 없다가 지난 8일 실종 96일 만에 싸늘한 시체가 된 채 발견됐다.
이날 오전 10시15분경 포천시 일대를 수색중이던 경찰은 소홀읍 이동교5리 식당 진입로변 콘크리트 배수관(길이 7.6m, 지름 60cm) 안에 다리를 가슴쪽으로 구부리고 웅크린 채 숨져 있던 엄양의 시신을 찾아냈다.
발견된 곳은 엄양의 집에서 불과 6km 떨어진 지역. 발견 당시 엄양은 실종 때 입고 있던 교복과 속옷 등이 모두 벗겨진 상태였고, 상반신이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포천∼의정부 축석검문소에서 남양주 방향으로 7백여m 지점으로 주변에는 식당 두 곳과 군부대가 있을 뿐 평소 인적이 뜸한 곳이다.
경찰은 이번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범인은 면식범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경찰이 이렇게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엄양의 시신이 발견된 위치와 유류품이 발견된 위치가 인접해 있다는 점. 경찰이 엄양의 사체를 발견한 곳은 지난해 11월28일 실종 23일 만에 엄양의 휴대폰, 가방, 운동화 등이 발견된 지점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이다. 경찰은 범인이 사체를 유기한 곳과 유류품을 버린 곳을 택한 정황 등을 미뤄볼 때 “이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자의 소행”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또 실종 당일 엄양의 행적도 면식범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단서. 경찰은 당시 엄양이 어머니와 “곧 집에 들어간다”고 마지막으로 통화한 직후 실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이 같은 추정을 근거로 사건 당시 범인은 ①번 길과 ②번 길(사건현장 주변 약도 참조)을 이용해 엄양을 납치해 도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엄양이 실종 직전 친구들과 헤어진 것으로 파악된 추산초등학교 후문에서 엄양의 집에 이르는 도로가 폭 2m가량 되는 농로(農路)여서 차량(경찰은 범인이 차를 이용했다고 보고 있다)이 진입하면 방향을 바꿀 수 없고 ①번 또는 ②번 길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 도로는 지역 주민들만이 알고 이용하는 길이라는 점도 면식범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
포천경찰서 수사관계자는 “범인이 차를 이용해 추산초등학교 후문에서 엄양을 납치한 후 대로인 43번 국도(의정부∼포천길)로 빠져나갔다고 가정한다면 이 농로를 이용했을 것이고, 이 길은 외부인들은 잘 알 수 없는 길이다”고 전했다.
또 현재 엄양의 사체에서 범인에게 강하게 저항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부분이다.
43번 국도의 경우 포천에서 의정부로 향하는 방향은 평일에도 상습 정체되는 지역. 엄양이 실종된 시각인 사건 당일 오후 6시 전후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에서 범인이 엄양을 태우고 의정부로 향했다고 보는 까닭은 엄양의 유류품이 의정부에서 발견됐기 때문.
상습 정체를 감안하면 범인은 당시 엄양을 태우고 거북이 운행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엄양이 차안에서 저항을 했다면 지나가는 차량에 의해 목격되었을 것이고 엄양이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양이 실종된 시간을 전후로 오후 5시30분에서 오후 7시30분 사이 43번 국도를 지나간 차량을 탐문수사하고 있는 경찰은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 사람은 아직 없다고 한다. 이 같은 점들로 미뤄 범인은 엄양이 저항할 의사가 없었던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경찰의 추정이다.
경찰이 쫓고 있는 또다른 가능성의 하나는 범인이 인신매매범일 수 있다는 것. 이의 근거는 엄양의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는 점. 엄양의 어머니에 따르면 엄양은 평소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실종 직전 함께 있었던 친구들도 엄양이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지 않았다고 전했다. 또 엄양의 머리카락 상태가 심하게 헝클어져 있는 것으로 미뤄 엄양이 납치 후 한참을 끌려다니다가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범인이 엄양을 유흥업소나 사창가에 넘기기 위해 범행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인근 유흥가와 직업소개소를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다.
또한 경찰은 이번 사건이 여러 점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과 유사해 모방범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만약 모방범죄라면 동일유형 범죄자의 소행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경찰은 현재 범인이 엄양을 다른 곳에서 살해한 뒤 배수로에 유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86년 일어난 화성사건의 첫 번째 희생자가 발견된 곳도 농수로 배수관 안이었다. 당시 희생자는 옷이 모두 벗겨진 상태였고 엄양과 마찬가지로 심하게 부패된 상태였다. 사체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화성과 달리 피해 여성의 손발을 결박하지 않았고, 입에 재갈도 물리지 않았으며, 목을 조르거나 성기 주변을 훼손시키지 않았다는 점 등 차이점도 없지 않다.
화성사건 담당형사였던 하승균 경정은 “화성사건과 엄양사건은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과 사체 발견 장소가 맨홀 안이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