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없음. | ||
요즘 정보기관 등의 개인 전화도청 문제가 국회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가운데 최근 무선전화를 도청해 불륜 사실을 알아낸 뒤 이를 미끼로 금품을 요구한 범죄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
지난 18일 고양경찰서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권아무개씨(41)가 저지른 무선전화 도청사건이 그것.
경찰 조사결과 권씨는 지난 98년 하나은행과 2003년 1월 국민은행 폰뱅킹 도청 인출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특히 권씨는 30대 초반까지 한 시중은행에서 일반 행원으로 재직하다 통신 보안업체 관련 사업을 했으나 사업이 여의치 않자 자신이 익힌 통신기기 도청기술을 이용, 범죄자로 전락했다.
은행원에서 통신 관련 사업가로 변신했다가 다시 범죄자로 전락한 권씨. 권씨는 하나은행 폰뱅킹 사기인출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돼 4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 2002년 12월 출감했으나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놀았다.
그러던 중 그는 지난해 1월 국민은행의 폰뱅킹을 도청해 1억2천만원을 인출했다. 손쉽게 돈을 번 그는 또다른 도청 범죄를 모색했다.
그는 지난 1월 안테나와 수신기 등을 구입하여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도청 시험을 하던 중 우연히 일반인들의 무선전화 내용을 엿듣게 됐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새 사업이 떠올랐다. 무선전화를 통해 오가는 내용 중 불륜과 연관된 것이 많다는 점을 알고 이를 이용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그는 곧바로 사업에 착수했다. 무선전화 내용은 의외로 녹음이 쉬웠다. 일반 유선전화는 전화단자함에서 직접 잭을 꽂아야 하는 위험부담이 따르지만 무선전화는 주파수만 맞추면 가능했다.
특히 무선전화는 한 주파수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특정지역에서 특정 주파수를 맞춰 놓으면 특정인의 통화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다. 권씨는 이런 방법으로 불륜 내용만을 발췌, 카세트테이프에 복사해 두었다.
권씨의 표적이 된 사람은 고양시에 거주하는 가정주부 임아무개씨였다. 임씨의 전화내용을 녹음하던 중 임씨와 친구들이 내연의 남자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았다.
권씨는 임씨의 전화를 계속 도청한 결과 집에서 음식점이나 편의점 등에 물건을 주문하면서 불러주는 자택 전화번호, 휴대폰 전화번호도 알아냈다. 경찰이 증거물로 압수한 카세트테이프에는 임씨가 친구들과 불륜 사실을 주고받은 3시간짜리 통화내용이 담겨 있었다.
권씨는 이 테이프와 돈을 달라는 협박편지를 동봉해 지난 1월28일 협박편지와 함께 임씨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동네 서점으로 보냈다. 권씨는 지난 1월28일부터 2월10일까지 매일 임씨에게 전화를 걸어 3천만원을 달라고 협박했다. 임씨는 협박편지를 받고 고민하다가 쉽게 해결이 안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범인의 신원파악에 나섰지만 권씨가 선불폰(일명 대포폰)을 사용하고 있어 쉽게 잡기가 어려웠다. 경찰은 권씨가 공중전화로 임씨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알아내 권씨가 이용한 공중전화 근처에서 잠복했다. 경찰은 2주 동안 잠복한 끝에 때마침 선불폰 통화가능 시간이 소진돼 공중전화를 이용하던 권씨를 체포했다.
경찰에 연행된 권씨는 위조된 신분증을 사용하고 있어 당초 초범으로 나타났으나 수사관들의 추궁 끝에 권씨가 사기, 절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 전과 7범임을 밝혀냈다.
수사를 담당했던 한 관계자는 “권씨가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자, 혀를 깨무는 등 자해행위를 시도했다. 또 권씨는 ‘이번에도 교도소에 들어가면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등 조사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밝혔다.
경찰에 의하면 권씨는 상고를 졸업하고 시중은행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은행의 전산시스템을 익힌 권씨는 통신장비에도 관심이 많아 독학으로 통신보안 장치 등을 공부했다. 권씨는 은행을 그만둔 뒤 보안산업에 뛰어들어 CCTV를 설치해 주거나 도청방지장치 등을 다뤘으나 사업이 어려워 범죄세계에 뛰어들었다.
권씨는 지난 98년 하나은행 전산실의 폰뱅킹센터ARS(자동응답장치) 교환기 단자에 설치한 도청장치로 고객의 계좌번호 등 신용정보를 알아낸 뒤 계좌에서 모두 3억원 이상을 빼냈다.
권씨의 하나은행 범죄는 당시 신종범죄였다. 하나은행 사건 직후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수사에 착수해 권씨 일당 7명을 붙잡았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당시 범행이 워낙 치밀하고 정교해 수사에 애를 먹었다”고 회상했다.
권씨는 출소한 직후인 2003년 1월에도 국민은행을 상대로 다시 폰뱅킹 사기 인출범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하나은행 때보다 더욱 정교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이 사건은 권씨가 사기인출한 고객의 주소가 전남 광주로 돼 있어 전남경찰청이 맡고 있다. 전남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권씨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는 대면수사해 봐야 알 수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외에도 권씨는 여죄추궁 결과 공무원 신분증을 위조해 사기대출을 시도하기도 했고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우편함에 들어있는 개인 신용카드청구서를 훔쳐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권씨가 아지트로 삼은 고양시 화정동의 한 오피스텔을 수색한 경찰은 권씨가 갖춘 장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찰은 “도청을 목적으로 한 안테나와 수신기가 여러 대 있었고 인터넷으로 미국에서 구입한 도청장비도 있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