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3일 박봉식 전 서울대 총장(72)이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의해 구속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땅 매입 알선 사기’가 그에게 적용된 혐의였다. 그는 한때 서울대 총장과 부산외국어대 총장을 지낸 지성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은 정치에 발을 담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총선출마를 위해 무리하게 정치자금을 모은 게 화근이었던 것. 최근 정치자금 문제로 정치권이 국민들의 외면을 받는 것처럼 정치판에 발을 담그면 누구나 흙탕물 속에서 뒹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박 전 총장의 몰락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당시 박 전 총장은 서울대 총장(85년∼87년), 부산외국어대 총장(94년∼96년)을 거친 뒤 정계 입문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위원 등의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는 정치에 대한 의욕이 강했다.
일단 정치 입문을 결정한 그에게 닥친 첫 번째 문제는 돈이었다. 선거에 출마하려면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것은 당연지사. 자금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상황속에 당시 박 전 총장의 측근이었던 김아무개씨(43)는 최아무개씨(여·43)를 한 카페에서 만나게 됐다.
당시 최씨의 남편은 건설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씨는 토지 매입에 관심이 많았다. 최씨가 박 전 총장의 측근인 김씨를 만난 이유는 김씨가 “토지공사 소유의 용인 죽전 지역의 땅 1만 평을 평당 3백20만원에 수의계약할 수 있게 해 주겠다”며 최씨를 유혹했기 때문.
당시 용인 죽전 일대에는 아파트 광풍이 불고 있었다. 최씨가 자신의 정보력을 총동원해 알아본 결과 김씨가 제안한 토지공사 소유의 땅은 투자가치가 충분했다. 그러나 최씨는 땅값으로 치러야 할 3백20억원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다.
최씨가 고민하자 김씨는 일단 토지공사와 수의계약으로 땅을 매입한 뒤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지으면 떼돈을 벌 수 있다고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김씨는 최씨에게 자신이 모시고 있는 박봉식씨(자민련 경남 양산 지구당위원장)가 토지공사 사장과 가까운 사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최씨는 14억원가량의 땅을 매입하기로 하고 1억원의 계약금을 마련, 박 전 총장의 지구당 사무실로 찾아가 전했다. 최씨가 박 전 총장 사무실로 찾아간 이유는 다른 경로를 통해 알아본 결과 박 전 총장과 토지공사 사장이 친한 사이였고, 박 전 총장을 통해 계약을 하면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씨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먼 나머지 정작 토지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간단한 절차를 생략했다. ‘설마 서울대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 거짓말을 할까’하는 생각으로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고 최씨는 검찰에서 밝혔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검찰 관계자도 “전화 한 통화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기본적인 것을 확인하지 않아 이런 사기를 당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어쨌든 2000년 1월13일 최씨는 박 전 총장의 지구당 사무실로 찾아가 직접 박 전 총장을 만났다. 최씨가 그 자리에서 “용인 땅 잘 부탁드립니다”고 말했고, 박 전 총장은 “걱정 마십시오. 잘 될 겁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본인에게서 직접 확인을 받은 이상 최씨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최씨는 그 자리에서 가지고 온 8천만원을 박 전 총장과 김씨에게 건네주고 다음날 2천만원을 전해 계약금조로 모두 1억원을 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영수증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1억원의 계약금이 전해진 뒤부터 문제가 터졌다. 돈을 건네준 지 사흘 뒤 최씨가 사려고 했던 땅이 토지공사 소유가 아니라는 소문이 나돈 것.
최씨가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그 땅이 토지공사 소유라는 것은 거짓이었다. 흥분한 최씨는 곧장 김씨가 자신에게 거짓말한 것을 추궁하며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씨는 1억원 중 2천3백50만원만 돌려주었다.
최씨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최씨의 남편은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비가 필요해진 최씨가 박 전 총장에게 돈을 돌려줄 것을 독촉하기 시작하자 박 전 총장은 나머지 돈에 대한 변제각서를 써 주었다. 그러나 최씨의 남편은 돈을 돌려받지 못하자 화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참다못한 최씨는 2000년 말 박 전 총장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재판에서 박 전 총장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김씨에게 모든 것을 떠넘겼다. 최씨는 다시 김씨를 고소했으나 김씨는 이미 잠적해 버린 뒤였다.
이 지루한 공방은 사건이 일어난 뒤 3년이나 이어졌고 마침내 2003년 12월 김씨는 검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김씨가 검거된 뒤 사건 전모가 드러나면서 결국 지난 2월 박 전 총장도 구속되었다.
검찰에 의하면 박 전 총장은 현재까지도 자신의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박 전 총장은 모든 것은 김씨가 주도한 것일 뿐 자신은 정치 후원금인 줄 알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
한편 박 전 총장의 변론은 박 전 총장이 현재 재직중인 것으로 알려진 K대 재단의 변호사가 맡고 있다. 학교측은 “일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올해 총선에 나갈 생각은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안다. 나이도 많은 데다가 정치판에서 더러운 꼴을 너무 많이 봐서 학자로서 정치에 씁쓸함을 느낀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정치판에 뛰어든 교육계 원로의 비참한 말로가 정치무상을 새삼 느끼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