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9년 열렸던 ‘경제청문회’에 한보 사태와 관련해 출두한 정태수 회장. 정 회장은 200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 ||
또 서울구치소 의무과장, 구치소장 등 구치소 간부들과 서울대병원의 의사와 전 병원장 등 병원 고위관계자들은 이들로부터 돈을 받고 허위진단서를 발급받도록 도와준 것으로 밝혀졌다.
구치소 간부와 병원 고위 관계자들은 이들 유명 인사들에게 허위진단서를 발급해준 대가로 건당 5백만원에서 3천만원을 받는가 하면 5백만원 상당의 롤렉스 시계와 2백50만원 상당의 최고급 양주를 상납받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 곽상도)는 정태수 한보그룹 명예회장의 아들 정보근 한보그룹 회장과 정진철 전 서울구치소 의무과장 등 9명을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했다.
이 사건은 유명 재벌그룹 오너 등이 거액의 금품을 병원관계자나 구치소 간부들에게 제공하고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다음은 검찰이 밝혀낸 이번 사건의 전말.
검찰 조사결과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재소자들과 서울구치소 의무과장, 구치소장 등을 연결시켜 준 인물은 한때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했던 이아무개씨(71)였다. 그는 자신이 구치소에 있을 때 외부 병원의 왕진을 할 수 있게 해달라며 구치소 의무과장에게 현금 5백만원과 롤렉스 시계를 주고 시가 1천5백만원 상당의 임야를 주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그는 출소 후 구치소장과의 친분관계를 살려 본격적으로 허위진단서로 병보석을 받아주는 브로커로 나섰다. 그 중에는 한보그룹의 정태수 명예회장도 있었다.
2002년 6월10일 정태수 회장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대장암 치료가 형집행정지의 이유. 그러나 최근 검찰 조사결과 정 회장은 형집행정지를 위해 전 서울대병원장 이아무개씨를 매수, 허위진단서를 발부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두 사람이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90년 초 이씨가 정 회장의 주치의를 맡으면서. 당시 그는 서울대병원 내과 과장으로 있었다. 정 회장은 검찰에 구속된 후 형집행정지를 신청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이씨로부터 의사소견서를 받았다. 이 진단서는 물론 정 회장이 형집행정지를 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미미한 사항들은 아주 급박한 질병으로 바뀌었고, 없던 내용도 추가되었다.
예를 들면 “급성심근경색은 발병 직후…(중략)… 약 12∼15%가 사망하며”라는 내용은 “(중략)… 약 12∼15%에 이르는 극히 위험한 질병임”으로 탈바꿈했다. 또 원래 진단서에는 없던 내용도 나중에 추가되기도 했다. “이 환자의 경우는 급성심근경색으로의 진행가능성이 극히 높을 뿐 아니라 발병시 생명에 치명적”이라는 내용이 추가된 것.
이 같은 진단서 내용은 판사들이 보더라도 당장 형집행정지를 시키지 않으면 재소자의 생명이 위독할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정 회장은 당시 급성심근경색뿐만이 아니라 고혈압, 당뇨, 협심증, 전립선비대증 등 다양한 질병들을 내세워 형집행정지를 요청했다. 물론 여기에는 이씨가 만들어낸 의사소견서가 덧붙여졌다. 이씨가 정 회장의 석방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자 정회장의 아들인 현 한보그룹 회장 정보근씨는 이씨에게 사례비로 2천만원을 전달했다.
2002년 5월30일 정 회장은 한림대 성심병원에서 대장암 의심 판정을 받았다. 그는 그 즉시 이씨에게 부탁해 그해 6월10일 신속히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이씨는 서울대를 떠나 국군수도병원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후배 의사를 정 회장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소개를 받은 의사 오아무개 씨는 이씨와의 친분 때문에 정 회장을 맡게 되었다. 오씨는 별도의 조직검사도 없이 대장암이라는 확정 소견서를 발부했다. 정 회장 측은 이씨에게 고맙다며 3천만원을 주었다.
검찰에 따르면 정 회장은 형집행정지로 출소 후 암수술을 실제로 받기도 해 다시 형집행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상황. 대신 진단서 발급 대가로 금품을 주고받은 이씨와 정태수 전 회장의 아들인 정보근씨만 형사처벌할 방침이라고 검찰은 밝혔다.
병보석 브로커인 이씨가 연결시켜준 또다른 인물은 상가분양업자로 서울시 신당동 재개발상가 분양 사기로 구속된 이아무개씨였다. 그는 당시 용산경찰서 화장실 창문을 타고 도주를 해 세간의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탈주 후 그는 심장질환을 빌미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로 자수를 했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서울대병원의 이아무개 교수의 도움으로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아 1개월간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또 구속집행정지를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식사를 거부해 탈진으로 심장병 악화를 기도하기도 했다. 공판 때도 들것에 실려 입장하고 탈진으로 재판 출석을 거부하기도 해 재판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며 탈출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내를 이용해 구속집행정지 신청에 필요한 진단서를 잘 써 달라며 서울구치소 의무과장과 서울대병원 이 교수에게 각각 2천만원과 1천5백만원을 주었다. 이후 이씨는 허위진단서로 구속집행정지를 계속 연장해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았다. 다시 구속될 처지가 되자 마침내 그는 병원을 빠져나가 도주했다.
그는 도피 후 신분을 위장, 중국으로 도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결국 검찰에 검거됐다. 도피중에 이씨는 병원치료를 한 번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피중에 이씨는 돈을 건네준 구치소 의무과장과 서울대병원 교수를 찾아가 “돈 받은 사실을 밝히겠다”고 협박해 나중에 돈을 다시 받아내기도 했다.
브로커 이씨는 구치소 의무과장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구치소장, 교도관, 의사까지 광범위하게 매수하기도 했다. 고속철도 차량선정 로비 및 안기부자금 세탁 혐의로 2002년 10월에 구속된 동남그룹 김인태 전 회장의 병보석을 위해 이씨는 1억원을 받았다. 그는 이 돈으로 의무과장에게는 1천5백만원과 2백50만원 상당의 고급 양주를 주고 구치소장에게는 9백50만원을 건넸다.
사건을 담당한 검찰 관계자는 “서울대병원의 교수가 작성한 진단서라고 하면 누구나 신뢰하기 마련인데 이번 수사에서처럼 환자에 매수되어 진단서 내용이 과장·왜곡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재소자를 관리해야 할 구치소 관계자들이 재소자들에게 매수된 것은 사회정의에 어긋난다. 재소자 관리를 보다 철저히 하고 진단서 내용을 검증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장치를 강구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