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17부(신성기 부장판사)는 지난 5월14일 S사 창업주인 이아무개 전 명예회장(80)이 막내아들을 상대로 낸 부당 이득금 및 대여금 반환 신청에서 이 전 회장의 청구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10여년 동안의 투병 생활로 거동조차 불편한 것으로 알려진 이 전 회장이 뜬금없이 막내아들에게 1백억원을 내놓으라며 법정 싸움을 벌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전 회장이 막내아들을 상대로 법원에 소장을 접수시킨 것은 지난해 2월 초. 이 전 회장은 실질적으로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아내와 두 아들이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임의로 소유권을 이전해 처분했다며 이로 인한 부당 이득의 반환을 청구했다. 지난 1977년 아내 김아무개씨에게 일시적으로 명의신탁한 토지를 아내와 두 아들이 공모, 결국 막내아들이 이를 차지한 뒤 일방적으로 처분했다는 것.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고 송사에 나섰다는 주장이다.
이 전 회장의 변호인측은 재판부에 이 같은 취지를 설명하면서 “막내아들 이씨가 지난 2000년 (문제의) 토지를 매각하며 받은 1백60억원 중 적어도 50억원을 지급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회장이 거론한 ‘토지’는 서울 서초동 소재 임야 약 1천7백평. 지난 1977년 12월 백아무개씨로부터 이 땅을 매입한 이 전 회장은 매입 당일 아내 김씨와 사업 파트너인 문아무개씨 명의로 절반씩 소유권을 이전했다. 이 가운데 아내 김씨 명의였던 땅이 다툼의 대상이 됐다.
김씨 명의의 서초동 땅 중 절반은 지난 83년 둘째 아들과 막내아들에게 1/2씩 소유권이 이전됐다. 두 아들에게 이전됐던 이 땅은 이듬해 다시 김씨 소유로 넘어왔고, 그후 또 다시 두 아들에게로 소유권이 넘겨졌다. 김씨 명의의 나머지 절반의 땅은 1989년 막내아들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다. 결과적으로 막내아들이 당시 모친 김씨 명의의 서초동 땅 중 3/4을 차지하게 됐던 셈.
이후 둘째 아들 명의의 서초동 땅은 95년 그가 사장으로 재작하던 S개발로 넘어갔으며, 2년 뒤엔 막내아들이 운영하던 P사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이로써 막내아들은 실질적으로 이 전 회장의 아내 김씨 명의의 서초동 땅을 모두 넘겨받게 됐다. 막내아들 이씨는 지난 2000년 8월 I사에 이 땅을 매각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만에 부자지간에 송사가 시작된 것이다.
막내아들 이씨가 법원으로부터 부친의 소송 제기 사실을 정식적으로 통보받은 것은 지난해 2월 중순. 이씨는 곧바로 법적 대응을 하지 않고 이 전 회장측 법률 대리인 등을 통해 소송을 취하하도록 아버지를 설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자가 법정에서 다툼을 벌인다는 사실 자체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하지만 이씨는 한 달쯤 뒤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원에 답변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을 설득하는 게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씨는 이 전 회장측 대리인을 통해 “한 달에 2천만씩 용돈을 드리겠다”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의 변호인은 “이씨가 대리인을 통해 부친에게 매달 용돈을 드리고 자신의 회사 주식까지 드리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이 전 회장측이 거부 반응을 보여 어쩔 수 없이 법적 대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 부자간의 법정 공방이 마무리되기까지는 1년 3개월이 걸렸다. 공방 과정 중 이 전 회장측은 지난 1997년 9월 이 전 회장이 막내아들에게 경영자금으로 사용하라고 줬다는 50억원에 대한 부분도 추가로 소장을 접수했다. 이 전 회장이 막내아들에게 경영자금을 빌려주면서 지난 2000년 9월 초순까지 갚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막내아들이 돈을 되돌려주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법원은 이 소송 건을 원 소송에 병합시키고 심리를 진행했다. 이 전 회장 변호인측은 부당 이득금 50억원의 반환과 함께 경영자금 50억원을 배상하라며 이자 지급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결국 지난 5월14일 이 전 회장의 청구를 기각하고 막내아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원고(이 전 회장)가 부인의 이름으로 이전시킨 부동산이 원고의 의사에 반하여 임의로 처분되었다는 원고측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고, 원고가 지난 89년 쟁점 토지에 부과된 증여세 9억원을 국세청에 납부한 사실을 감안할 때 원고 스스로 상속을 고려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며 “토지의 소유권 이전 사실을 몰랐다는 원고측의 주장은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특히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이 80년대 들어 여러 차례 부인과 아들들에게 땅의 소유권을 이전시킨 점은 당시 60대였던 이 전 회장이 경영 일선 은퇴를 결심하고 아들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경영 자금으로 빌려줬다는 50억원에 대해서도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며 대여금 반환 청구를 기각했다.
이씨의 변호인은 판결 결과에 대해 “하지 말았어야 할 재판이었다”며 씁쓸해 했다. 이 변호인은 “특별한 증거도 없었고, 재판이 들어가기 전부터 송사 주체인 이 전 회장은 지병으로 인해 판단력이 떨어지고 기억까지 오락가락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재판 자체가 무의미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 전 회장의 변호인측은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 채 판결 결과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항소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유명 속옷 회사 창업주 부자의 법정 공방 사실이 공개되자 재계 일각에서는 이 전 회장이 막내아들을 상대로 송사를 벌이게 된 배경을 두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특히 지난 1990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 전 회장의 건강이 소송 시점 전후로 급격히 나빠진 사실이 재계에 퍼지면서 실제 소송을 진행한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커져만 가고 있다.
실제 이 전 회장은 10여년 전부터 파킨슨씨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했으며, 근래 들어서는 가끔씩 주위 사물이나 위치 등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증세가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이 전 회장이 아닌 주변의 제3자가 이번 소송에 관여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다.
일부에서는 이 전 회장과 자식들 간의 불편한 관계가 송사의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 전 회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내 김씨와 따로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자식들이 자신과 거리를 두자 이 전 회장이 홧김에 소송을 벌이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