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씨는 부산 서동일대에 허술한 집이 많아 침입이 쉬운 점을 이용해 주로 혼자 사는 여성의 집을 노렸다고 한다. | ||
곧이어 좁은 골목에서 형사들과 검은 그림자의 격렬한 대결이 시작됐다. 뒤엉켜 격투를 벌인 지 30분이 지나서야 형사들은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지난 4년간 이 지역 일대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연쇄 절도·강도·강간 사건의 베일 속 용의자가 붙잡히는 순간이었다.
뜻밖에도 용의자는 전과가 전혀 없는 부산 모 대학의 학생이었다. 외모 또한 범죄의 냄새를 맡기 힘들 만큼 여리고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선 주체할 수 없는 범죄의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6월20일 금정경찰서는 부산 모 대학교 4학년 김아무개씨(26)를 강도강간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 4년간 서동 일대에서 절도, 강도, 강간을 일삼아 민심을 흉흉하게 했던 장본인. 그는 낮에는 대학가에서 절도를, 밤에는 자신의 집 인근에서 강도와 강간을 저지르는 생활을 반복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다니던 대학에서 그다지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말이 적고 주로 혼자서만 다니는 내성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는 범죄의 유혹과 마주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마치 ‘범죄중독증’ 환자처럼 주변의 모든 사람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도서관의 빈자리에 놓여 있는 CD 플레이어, 카세트 녹음기, 전자수첩, 지갑, 가방 등을 닥치는 대로 훔쳤다. 또 아무도 없는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 노트북 컴퓨터와 지갑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밤에는 아예 강도·강간범으로 변신했다. 인적이 끊긴 새벽이 되면 김씨는 집을 나섰다. 서동 일대에 허술한 집이 많아 침입이 쉬운 점을 악용해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의 집을 주로 노렸다. 김씨는 집안에 침입하면 먼저 잠든 상대 여성의 손발을 묶고 강제로 관계를 맺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갑작스레 습격을 당한 피해여성들은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욕구를 푼 뒤에는 마치 전리품처럼 귀중품을 빼앗아 달아났다.
김씨는 이 과정에서 범행도구를 철저히 현장에서 조달했다. 피해여성의 집안에 있는 부엌칼을 상대를 위협하는 도구로 이용했고, 여자의 치마나 커튼을 찢어 손발을 묶는 데 사용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피해자 주변의 물건을 이용했던 것.
이른 새벽까지 혼자 사는 여성의 집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길 가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날치기를 일삼았다. 핸드백을 낚아채 달아나는가 하면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때리며 겁을 주기도 했다. 이른바 날치기, 퍽치기, 들치기 등 김씨의 소행은 한마디로 길거리 범죄의 ‘종합백과사전’을 방불케 했다.
김씨는 일반적인 범죄자와 달리 훔친 물건의 상당수를 집안에 고이 ‘모셔 두고’ 있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렇게 피해 물품을 보관해온 데 대해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물건을 훔쳤지만 (범행)하고 난 뒤에는 항상 후회스런 기분이 들었다. 피해자에게 물건을 돌려주자니 차마 용기가 안 나고, 그러다 잡힐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냥 보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성폭행을 한 뒤에도 죄의식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순간의 욕망 때문에 일을 저질렀지만 항상 피해여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성폭행을 하는 순간에도 상대방이 혹시라도 임신을 할까봐 나름대로 배려(?)를 했다는 게 김씨의 변명 아닌 변명.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범죄 욕구를 거의 자제하지 못했다.
김씨는 범행이 거듭될수록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별력이 무뎌지면서 일종의 ‘범죄중독증’을 나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4년 전 군에 복무할 때부터 내무반 동료의 지갑을 훔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시작한 자신의 범죄에 대해 아무런 제제가 없자 상습적인 도벽을 나타내게 됐고 점점 더 대담한 범죄의 세계로 빠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김씨가 일반 범죄자와는 다른 복잡한 내면을 보이자 경찰은 정신감정을 의뢰하기도 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씨의 범행이 어린 시절의 ‘안 좋은 추억’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씨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던 것 같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가족들을 때리는 등 행패가 잦았고, 이 때문에 몇 년 전에는 어머니가 가출을 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김씨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감이 컸다는 것. 그럼에도 김씨가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아 가족들은 그저 대학을 착실히 잘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약 4년 전부터 시작된 김씨의 범행은 최근 1년 사이 부쩍 잦아졌다. 서동 일대에서는 밤마다 들치기, 퍽치기, 날치기, 강도, 강간 사건이 쉴 새 없이 터져 동네 분위기가 흉흉한 상태였다. 그간 경찰은 피해자들이 설명하는 범인의 인상착의를 통해 동일인의 범죄로 판단하고 수사를 계속해 왔다.
김씨는 복면 같은 것도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 인상착의가 확실했음에도 쉽게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보통 동일 수법의 전과자 탐문을 통해 용의자를 압축하는 것이 수사의 첫 번째 수순인데, 김씨는 전과기록이 없어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
그러던 지난 6월16일 새벽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김씨는 평소 눈여겨 본 한 여성의 집에 몰래 침입해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피해여성이 기지를 발휘해 김씨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따뜻한 말로 김씨가 다시 찾아오도록 그의 마음을 녹여놨던 것.
경찰은 피해여성의 신고를 받고 김씨가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라 판단, 이 여성의 집 주변에서 잠복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뒤 김씨가 실제로 이 여성을 찾아왔다가 형사들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경찰은 피해물품을 일일이 사진을 찍어 김씨가 다니던 대학교에 전시해 피해자들이 찾아가도록 했다. 대부분의 압수품들은 주인을 찾았고 그 외의 물건들은 검찰에 증거물로 송치됐다. 소식을 들은 다른 대학에서도 도난품을 찾으러 오기도 하고 전화문의를 계속해 오는 상황. 비록 김씨는 붙잡혔지만 금정구 서동 일대에 떠돌던 ‘괴담’은 당분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