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주소창에 모 국회의원의 한글이름을 입력하자 ‘야한’ 사이트로 연결됐다. | ||
이런 당혹스러운 일을 당한 것은 A의원뿐이 아니었다. 다른 몇몇 의원들도 비슷한 곤욕을 치렀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바로 빗나간 ‘사이버스쿼팅’(cybersquatting) 때문이다.
사이버스쿼팅이란 인터넷상의 컴퓨터 주소인 ‘도메인’을 투기나 판매 목적으로 선점하는 행위. 하지만 일부 도메인 선점자들이 해당 도메인이 제값에 팔리지 않자 도메인 관련 인사들을 ‘압박’하기 위해 이를 포르노사이트에 연결시켜 놓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는 것.
지난 8월25일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구속한 ‘도메인 협박범’ 이아무개씨(25) 사건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 이씨는 유명인사들의 한글 이름 인터넷 도메인을 선점한 후 비싼 가격에 사지 않으면 이를 음란사이트에 링크시키겠다고 협박한 혐의를 받고 있다.
피의자 이씨는 대전의 한 작은 회사 직원으로 사건 당시 7천만원의 빚을 진 상태였다. 그는 예전 이른바 ‘닷컴’ 열풍이 불 때 도메인이 수십억원에 팔리기도 했다는 점에 착안해 한글 도메인을 팔아 빚을 갚겠다는 엉뚱한 계획을 세웠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가 한창이던 올해 3월26일 이씨는 국회의원 후보들 중 당선 가능성이 높은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한글 도메인을 사들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씨는 ‘돈이 될 만한’ 장관, 유명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스타 등의 도메인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이렇게 그가 선점한 유명인사 관련 한글 도메인은 모두 1백91개. 여기에 사용된 돈만도 1천만원에 이르렀다. 거액의 빚을 지고 있는 상태였지만 ‘대박’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셈.
그는 상당수 국회의원들이 실명으로 된 한글 도메인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도매인 거래에 대한 장밋빛 꿈을 키웠다. 한글 도메인을 미처 확보하지 못한 초선의원들이나 정치신인들로부터 자신에게 연락이 올 것으로 기대했던 것. 현재 2백99명의 의원 중 자신의 실명으로 된 한글 도메인을 갖고 있지 않은 의원은 83명. 일부 의원은 동명이인이 이미 도메인을 사용중인 경우이지만 대부분은 누군가가 판매를 목적으로 도메인을 선점해 놓은 상태다.
그러나 이씨의 생각만큼 ‘작업’이 잘 되지는 않았다. ‘매매 기운’이 거의 없자 이씨는 도메인을 팔기 위해 국회의원 7명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씨가 처음 제시한 가격은 5백만원이었다. 이씨로부터 메일을 받은 한 국회의원의 보좌관은 “지난 6월 초 이씨로부터 메일이 왔다. 우리도 의원님의 이미지를 위해 도메인을 사려고 했으나 이 사람이 부른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그래서 가격을 흥정하기 위해 메일을 몇 번 주고받았다. 그러나 결국 가격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그런데 8월 초에 의원님 이름을 치면 포르노 사이트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돼 상당히 당혹스러웠다”고 털어놨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이씨의 제안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의원들의 이름으로 된 한글 도메인이 없으면 아쉽기는 해도 그걸 돈 주고 살 필요까지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그런 메일이 오기는 했는데 우리는 전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해당 도메인을 포르노사이트와 링크시키는 이씨의 ‘압박’이 계속되자 몇몇 피해를 본 국회의원들은 결국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이씨는 체포된 뒤 경찰에서 “누군가에게 위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장난삼아 해본 것인데 이렇게 과중한 벌을 받게 될지 몰랐다”며 선처를 구했다. 이씨의 부모는 아들의 구명을 위해 피해를 입은 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용서를 빈다는 탄원서에 도장을 받아갔다고 한다.
한편 이씨 이외에도 국회의원들의 한글 도메인 여러 개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개인은 2∼3명이나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한 명은 얼마 전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1백만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응한 의원은 없었다. 한글 도메인 보유자 중 한 명은 6명의 의원 이름으로 된 한글 도메인을 가지고 있는데 해당 의원들의 이름을 치면 똑같은 화면으로 연결된다. 이곳에는 ‘도메인을 판매합니다’라는 문구와 연락처가 떠 있다. 기자가 연락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번 사건 때문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씨 외에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메인 거래’ 메일을 받은 한 의원은 “주위에 아는 사람들이 영어 도메인은 외우기 힘드니까 한글 도메인을 만들라고 해서 확인해 봤더니 누군가 이미 등록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자니 나중에 부담이 될 것 같고 안 응하자니 주변에서 불편을 호소해 골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고 입장을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이 같은 사이버스쿼팅 행위와 관련해 “현재 한글이름 인터넷 도메인 등록의 경우 실명확인 절차가 없으며 달리 이를 규제할 법적 근거도 없어 향후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우려가 농후하다. 현재 사이버스쿼팅을 방지하는 법안을 준비중이다”고 밝혔다.
이씨는 구속됐지만 이씨가 보유하고 있는 유명인사들의 도메인들은 여전히 그의 소유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씨가 이를 해당 의원 등에게 양도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들 국회의원과 유명인사들은 당분간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한글 도메인을 갖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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