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네 살배기 어린이의 살인을 의뢰했다는 것과 그 의뢰 방법으로 인터넷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줬다. 다행히 살인청부업자 이씨가 살해계획만 세우고 실행에 옮기지 않아 A씨의 딸은 무사했다. 안씨는 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거남의 어린 딸을 죽이려 했을까.
경찰에 따르면 안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커피숍에서 서빙아르바이트를 하다 동거남 A씨를 만났다. 당시 A씨는 별다른 직업도 없는 유부남이었다. A씨가 안씨가 근무하는 커피숍에 자주 드나들면서 둘은 점차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후 A씨는 안씨와 같이 살 것을 결심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딸의 양육권도 포기했다. 그러나 A씨의 부모는 안씨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고, 안씨와의 동거도 완강히 거부했다.
경찰 관계자는 “A씨 부모가 전 며느리가 살림도 잘하고 자신들에게도 잘해줘 A씨의 이혼에 적극 반대했다. 특히 A씨의 부모는 손녀를 무척 예뻐했는데 결국 안씨가 동거남의 딸에게 자신의 불만을 쏟아부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부모’로부터 외면받는 와중에 안씨는 임신을 하게 됐다. 처음에 그녀는 이젠 A씨의 부모들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A씨의 부모는 임신중인 안씨가 찾아가도 예전에 살던 얘기뿐이었다. 특히 손녀 얘기만 늘어놔 안씨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게다가 A씨 역시 자신과 동거하고 있음에도 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내비치자 안씨는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된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A씨의 딸을 살해할 것을 결심했던 것.
경찰 조사에서 안씨는 “(A씨 부모가) 나를 예뻐해 줄 수도 있었는데 임신까지 한 나에겐 관심도 없었다”며 “A씨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안씨의 살의가 실제 청부로 이어진 것은 지난 1월. 안씨는 인터넷 검색 중 우연히 이씨가 운영하는 ‘블랙 캣’이라는 카페를 알게 됐다. 이 카페에서 “무슨 일이든 상담하세요. 비밀은 보장합니다”라는 메일을 받고 안씨는 A씨의 딸을 살해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안씨는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약 30통의 메일을 이씨와 주고 받으며 A씨의 딸을 살해하기 위해 계획을 짰다. 당시 안씨가 이씨에게 보낸 메일은 이런 내용들이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내일 어느 정도 해드려야 할까요? 제가 상황상 큰 금액은 힘들겠고 최소한으로 말씀해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메일 주세요.”
“어떤 방법으로 아이를 해결해 주시나요? 특별히 제시할 건 없지만 넘 잔인한 방법은 아녔음 좋겠네요. 이런 말도 우습지만 마지막 남은 양심으로써…. 우연을 가장한 교통사고라면 가장 좋을 텐데. 헤~^^;;
어쩌다가 제가 이렇게 되었는지. 이럴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이런 메일 외에도 안씨는 이씨와 전화통화를 하며 A씨의 딸을 죽이기 위해 범행을 모의했다. 이후 안씨는 이씨에게 착수금 및 사례비 명목으로 10회에 걸쳐 9백만원을 송금했다.
경찰에 따르면 안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녔지만 빚이 많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그럼에도 안씨가 월급을 타는 대로 조금씩 이씨에게 돈을 보냈던 걸 보면 그녀의 ‘질투’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일단 떠올린 범행 수법은 ‘교통사고’였다. 이씨는 안씨에게 “교통사고를 가장하면 주위에서 의심도 안 받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이씨는 안씨의 돈만 받은 채 살인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경찰 조사에서 이씨는 “살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돈을 받기 위해 요구에 응했고, 이야기를 받아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경찰 역시 형편이 궁했던 이씨가 청부살인을 할 생각이 아니라 돈만 가로채기 위해 카페를 만들고 회원을 모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씨는 안씨에게 “여자아이는 죽여서 불태워 야산에 묻었다”며 “증거사진도 있으니 보여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안씨는 “이씨가 아이를 죽였다는 말에 반신반의했다”며 “실제 죽이지는 않아 다행이다”라고 뒤늦게 후회했다.
돈을 가로채기 위해 청부살인을 맡겠다고 ‘사기’를 친 이씨와 그런 이씨에게 살인을 청부했다 사기 피해(?)를 당한 안씨. 과연 두 사람의 행위는 어떤 죄목에 해당할까.
경찰은 이씨와 안씨가 구체적인 살해방법 등을 논의한 점을 들어 일단 ‘살인예비’ 단계를 넘어섰다고 보고 의뢰자인 안씨는 물론, 이씨에 대해서도 ‘살인음모’ 혐의를 적용했다. 만약 이씨가 살인을 시도했다면 살인미수 또는 살인 혐의를 받았을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청부업자’ 이씨의 지난 과거사 또한 파란만장했다. 이씨는 2002년 컴퓨터 그래픽 관련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 신용불량자가 된 후 ‘하류인생’을 살아왔다. 그는 어선을 타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이런 범행에까지 발을 들여다 놓게 됐다. 그는 경찰에서 “단지 돈을 벌 목적이었지 사례비를 받고 다른 범행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경찰 수사가 계속되면서 이씨에게 4백만원을 건네고 ‘직장동료로 추정되는’ 한 사람을 살해해달라고 의뢰한 ‘의문의 인물’도 용의선상에 떠올랐다. 경찰은 “이 사람은 메일을 보낼 때도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 아직 정체를 파악하진 못했다. 그러나 IP 추적 등 보강 수사를 통해 꼭 실체를 밝혀내겠다”고 전했다.
비록 이씨에게 살해 의사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번 사건에선 실제 돈이 지급된 살인 청부가 두 건이나 이뤄졌다. 익명의 사이버세상에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죽음을 청부하는 세태가 섬뜩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