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의자 김씨가 ‘주문제작’한 의사 신분증. | ||
경찰 조사 결과 실제 유부녀로 판명된 이 젊은 여성은 자신이 대구의 한 대학병원 의사라고 신분을 속였고 더구나 주변에 밝힌 이름마저도 가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피해자인 ‘동거남’은 충격을 받아 집을 나간 상태였다.
딸 셋까지 딸린 이 여성은 대체 어떻게 ‘처녀 의사’ 행세로 완벽하게 주위를 속일 수 있었을까. 또 이 여성의 남편은 아내가 자신과 딸들을 팽개치고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는데도 왜 가만히 있었던 걸까.
사기 혐의를 받고 있는 이 20대 여성은 김아무개씨(27). 피의자 김씨는 다소 통통한 얼굴에 키가 160cm도 채 안되는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지난 10월24일 하루 동안 경찰서에 구금됐던 김씨는 그후 구속영장이 반려돼 불구속으로 입건된 상태. 김씨의 고백과 경찰 조사에서 밝혀진 내용 등을 토대로 이 웃지 못할 사건의 앞과 뒤를 따라가봤다.
피의자 김씨는 요즘 세태로 보아 상당히 일찍 결혼한 경우였다. 남편을 만난 시기가 대학교 1학년 때. 당시 남편은 김씨가 다니던 한 지방대학에서 시간강사를 맡고 있었다. 이 인연이 이어져 두 사람은 곧 결혼에 골인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김씨의 나이 만 19세 때였다. 김씨는 다음해 들어 첫딸을, 이후 두 딸을 더 낳았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 박봉의 시간강사를 하던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일을 벌이다 차츰 빚만 불어나게 됐다. 김씨 또한 무리하게 돈을 빌리다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빚독촉이 시작됐고 김씨는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국 수천만원의 빚을 떠안은 남편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김씨 또한 슈퍼마켓 점원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전세에서 월세로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김씨가 말소되었던 주민등록을 되살리자 또다시 여기저기서 빚독촉이 시작됐다. 결국 김씨는 빚독촉에 시달리다 두 달 전 집을 나왔다. 남편에게는 ‘친구집에 있다’며 안심을 시켰지만 실상은 친구집과 여관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8월26일 김씨는 친구가 인터넷의 어느 게임 사이트를 통해 채팅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호기심이 생긴 김씨는 친구의 아이디로 채팅을 시도했다. 이렇게 피해자 이아무개씨(33)와 ‘접속’이 이뤄졌고 두 사람은 다음날 곧장 만나게 됐다. 김씨는 자신을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미혼이라고 소개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남을 거듭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급기야 김씨는 이씨와 결혼을 약속하고 지난 9월15일부터 이씨의 집으로 들어가 동거를 시작했다.
이씨 집에는 이씨의 어머니와 동생까지 함께 살고 있었다. 이씨 가족들은 ‘처녀 의사’인 김씨를 이씨의 아내로 인정했고 곧 결혼식을 치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씨가 동거남 이씨 등을 상대로 교묘히 의사 행세를 할 수 있었던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학에서 보건 분야를 전공해 일반인들이 모르는 의료지식을 지니고 있던 데다 병원 사정에도 훤했기 때문이었다. 동거남 이씨가 병원으로 찾아올 때면 김씨는 흰 가운을 입고 의사 신분증을 달고서 응급실을 왔다갔다했다. 김씨의 이런 모습에 이씨는 전혀 의심을 품지 못했다.
김씨에 따르면 김씨가 입었던 의사용 가운은 약사인 친구에게서 빌린 것이었고, 의사 신분증은 대구 시내의 한 명찰가게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신분증은 아크릴판에 사진과 글자가 인쇄된 것이었는데 실제 이 대학병원의 신분증과 전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동거를 시작한 뒤 김씨는 세 차례에 걸쳐 이씨로부터 모두 3백10만원의 돈을 받아냈다. 10월5일 김씨는 이씨에게 ‘후배의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70만원을 받아 갔다.
열흘 후에는 자신이 신장 이식 수술을 해준 사람이 있는데 혈액투석을 해야 한다며 40만원을 받아냈다. 또 10월21일에는 자신이 후배의 그랜저 승용차를 몰다 볼보 승용차를 들이받았는데 2백만원을 물어주게 되었다며 돈을 받아가기도 했다.
김씨는 이씨 가족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이씨의 아기를 가졌다고 얘기하기까지 했다. 또한 김씨는 동거남 이씨를 자신이 다니는 병원 총무과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속이기도 했다. 그 탓에 이씨는 이전 직장을 그만두고 병원 취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로 감춰야 했고 이 과정에서 동거남 이씨의 어머니는 김씨에 대한 의심을 조금씩 품기 시작했다. 김씨가 젊은 나이에 전문의가 된 것이나 의료 자격증이 6개나 있다고 자랑한 얘기들이 결국 ‘미래의 시어머니’의 의구심을 키웠던 것.
지난 10월23일 김씨와 이씨가 외출한 틈을 타 김씨의 가방을 뒤져본 이씨의 어머니는 김씨의 주민등록등본과 주민등록증 발급신청서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동안 김씨는 자신의 일곱 살 난 큰딸 이름을 사용해왔는데 이 사실이 들통났던 것이다.
결국 이씨 어머니의 추궁에 김씨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간 속아왔던 것이 너무나 원통했던지 이씨의 어머니는 곧바로 김씨를 경찰서로 데리고가 사기죄로 처벌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거짓말한 것은 잘못이지만 이씨를 사랑한 것은 진심이었고 언젠가 사실대로 다 털어놓으려 했는데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씨에게서 받은 돈도 다시 돌려주었기 때문에 결국 김씨는 구속을 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씨가 ‘처녀 의사’ 행세를 하며 ‘외간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던 동안 김씨의 남편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김씨에 따르면 김씨의 남편은 예전부터 아내와 이혼하겠다고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씨가 집을 나가 무엇을 하든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피해 당사자 이씨는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해야겠다며 집을 나서 여행을 다니는 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