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범죄의 재구성>의 한 장면. 김선생(백윤식 분)이 한국은행을 등쳐먹을 작전을 짜고 있다.(위) 10억원짜리 위조수표. 사기인출 일당은 발행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수표 정보를 빼낸 것으로 드러났다.(아래) | ||
다. 수표가 발행된 인천농협 부평지점에 전화로 발행일자와 액수, 일련번호를 확인했다. 또 위조수표 감별기에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이 수표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절차를 통과했고 농협측은 수표 주인이 원하는 대로 3억원은 현금으로, 10억원은 1억짜리 수표 10장으로, 2억원은 이 남자의 계좌로, 15억원은 8개의 은행계좌로 이체했다. 현금 3억원을 쇼핑백에 들고 농협 문을 나선 이 남자는 택시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놀랍게도 다음날 인천농협 부평지점에는 전날 입금된 수표 4장과 똑같은 수표 4장의 인출 의뢰가 들어왔다. 이 수표 역시 위조수표 감별기에서 진짜로 나타났고 수표에는 아무런 위조의 흔적이 없었다. 확인 결과 이튿날 들어온 수표가 진짜, 전날 들어온 수표가 위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누군가가 액수와 일련번호가 완전히 똑같은 ‘쌍둥이 수표’를 이용해 무려 30억원이라는 거액을 빼내간 기막힌 사기인출사건이 발생한 것.
사건이 일어난 지 42일이 흐른 지난 11월17일 의정부경찰서는 농협에서 30억원을 인출해 간 송아무개씨(60)와 공범 김아무개씨(38)를 경기도 안산에서 검거했다. 수사 결과 이 사건에 연루된 공범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20일 현재 경찰은 사건 관련자 10명을 검거했다. 그러나 경찰은 ‘몸통은 따로 있다’며 나머지 일당을 검거하기 위해 24시간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수사 결과 밝혀진 이들의 수법은 마치 영화 <범죄의 재구성>처럼 치밀했다. 각자의 전문 분야를 살려 팀을 구성해 오랫동안 준비해왔고 돈을 찾은 뒤에는 순식간에 돈을 세탁한 뒤 잠적해 버렸다. 하지만 범행 과정에서 이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단서를 남기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위조한 수표는 10월5일 인천농협 부평지점에서 한 벤처기업이 발행해간 수표였다. 송씨 등 일당은 똑같은 지점에서 발행된 소액권 수표에서 액수와 일련번호를 특수 약물로 지우고 다시 액수와 일련번호를 인쇄했다. 이들은 9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부평지점 소액권 수표 20장을 미리 확보해 놓은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 결과 이들 일당은 수표 ‘위조팀’과 수표 ‘인출팀’으로 나눠져 일을 진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두 팀끼리는 마치 점조직처럼 서로의 신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인출을 담당한 김씨는 검거 후 경찰에서 “나는 수표를 건네받아 인출만 담당했을 뿐 주범은 따로 있다. 정확한 신분은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위조 수표는 택배로 전달받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들 두 팀은 30억원을 15억원씩 나누어 가지기로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출팀 송씨가 농협까지 타고 왔던 위조팀의 차량을 다시 타지 않고 급하게 택시를 잡아 타고 가버리면서 탈이 났다. 애초에 약속했던 것과 달리 30억원을 가지고 도주해버린 것. 거액의 돈을 둘러싸고 팀 간에 내분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꼬리가 밟힌 인출팀은 다시 위조팀에게 1억원짜리 수표 10장을 건네고 나머지 5억을 이체해 주기로 했다. 위조팀의 조아무개씨(50)는 농협중앙회 유아무개 과장(35)의 소개로 명동의 사채업자를 통해 이들 수표를 세탁했다.
이들은 사채업자가 관리하는 증권계좌에 투자 명목으로 1억원짜리 수표를 입금한 뒤 계약을 취소해 위약금을 뗀 나머지를 현금으로 돌려받는 수법으로 수표를 현금화했다. ‘수고비’로 8천만원을 받은 유 과장은 지난 15일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됐다.
한편 인출팀은 송씨가 농협 장암지점에서 분산이체한 15억원을 다시 분산이체한 뒤 수십 군데의 현금인출기에서 되찾아 모두 현금화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 일당은 몇 단계에 걸쳐 대포통장을 이용해 철저히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는 치밀함을 보였다. 위조 사실을 파악한 농협측이 부랴부랴 수표 10억원과 계좌이체된 17억에 대해 지급정지를 요청했으나 이미 수표 10억원은 증권회사에 입금되었고 13억은 다른 계좌로 이체된 뒤였다.
이미 피의자 10명이 붙잡혔지만 이번 사건은 아직 ‘진행형’이다. 인출사기극이 남긴 의문이 적잖기 때문이다.
대체 이들 일당은 발행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수표 정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었을까. 또 이 교묘한 사기극을 총지휘한 배후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경찰은 수표를 찾아간 벤처기업 내부에 정보 제공자가 있을 가능성을 놓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이번 사건의 ‘기획자’로 거론되는 김아무개라는 인물의 뒤를 쫓고 있다.
현재 이들 일당 중 송씨, 김씨 등 인출팀에서 6명, 조씨와 유 과장 등 위조팀에서 4명이 구속된 상태. 나머지 관련 인물들은 이미 행방을 감췄다. 과연 경찰이 찾아낼 사기인출사건의 ‘몸통’이 무엇인지 향후 수사가 주목된다.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