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양천경찰서 강력반 사무실. 왜소한 체구의 한 40대 여인이 수갑을 찬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의 죄명은 살인교사. 이날 구속된 최씨는 평소 남편의 폭행에 시달려 오다가 최근 자신의 불륜 사실을 안 남편의 폭행이 더욱 심해지자 생면부지의 20대 청년들에게 ‘남편 죽이기’를 청부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의 남편 한상경씨(가명·44)는 무면허 치과의료업자로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그나마 벌어들이는 돈을 도박판에 쏟아부어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는 자신만이라도 가정을 돌볼 생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평소 친언니처럼 여기는 사채업자 이성녀씨(가명·45)와 함께 사채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화근이었다.
최씨는 바깥일을 하면서 한 남자와 사귀게 됐고 아내의 불륜사실을 알게 된 남편 한씨는 최씨를 가만두지 않았다. 지난 6년간 최씨는 물론이고 세 명의 자녀들도 한씨의 폭행으로부터 편할 날이 없었다.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나를 때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불륜사실을 알고부터는 아이들을 마구 발로 걷어차고 짐승 다루듯이 했다. 힘없는 아이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최씨는 세 남매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그런 최씨가 남편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난해 3월. 최씨는 이씨를 통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이씨는 사채업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박일도씨(가명·24) 등 20대 젊은이 3명을 최씨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박씨 등은 모두 친구사이로 일정한 직업이 없는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살인을 청부받은 박씨 일당은 처음에 최씨의 부탁을 받고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물론 돈이 필요했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처음엔 두려웠지만 최씨가 ‘남편이 죽으면 보험금 1억원이 나오니 절반을 주겠다’고 해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진술했다. 한 수사 관계자는 “박씨 등 3명은 중죄를 범했지만 전과도 없는 정말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전문가도 아니어서 오히려 살인을 부탁한 최씨에게 ‘어떻게 죽이면 되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전했다.
최씨와 박씨 등이 살인을 모의한 끝에 제일 먼저 계획한 ‘시나리오’는 교통사고를 위장해 남편 한씨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최씨는 착수금 명목으로 박씨 일당에게 4백만원을 주고 남편이 자주 다니는 모 볼링장 위치와 이동경로까지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박씨 일당은 렌터카를 이용해 남편 한씨를 볼링장에서 집까지 여러 차례 미행하며 기회를 엿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최씨 역시 교통사고로 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음을 알고 계획을 수정했다. 수사 관계자는 “최씨와 박씨 등은 교통사고로 위장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비용도 많이 들고, 설사 교통사고를 내더라도 한씨가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손해배상금으로 지급될 돈이 더 많을 것 같아 다른 방법을 고려했다”고 전했다.
이들이 선택한 두 번째 시나리오는 노상강도를 위장한 살인이었다. 최씨는 박씨 일당에게 “내가 알아보니 강도를 당해 숨져도 보험금이 나온다고 하더라. 차라리 길거리에서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박씨 일당은 청계천 일대에서 흉기를 구입해 한씨를 뒤쫓아 다녔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다. 한씨가 외출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고, 범죄 경험이 없는 박씨 일당이 길거리에서 사람을 찌르고 도망가는 일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
시간만 자꾸 흐를 뿐, 남편 살해 계획이 여러 차례 실패하자 최씨는 초조해졌다. 결국 최씨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제안했다. 남편이 집에서 자고 있는 시간에 박씨 일당이 강도를 위장해 범행을 하는 것. 이것이 이들이 선택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최씨는 지난해 11월12일 남편이 전날 늦게 잠자리에 들어 늦잠을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날 오전 9시40분께 박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남편이 자고 있다. 나는 현관문 잠그지 않고 외출할 테니 빨리 와서 처리해라”는 얘기였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씨 일당은 연락을 받자마자 최씨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안방에서 자고 있던 한씨를 망치로 내리치고 지니고 있던 흉기로 옆구리를 찔러 살해했다. 한씨가 죽은 것을 확인한 박씨 일당은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장롱을 열고 물품을 뒤진 흔적을 남기고 도주했다.
이후 최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사건 현장을 보고 집에 강도가 들어 잠자고 있던 한씨가 변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수상한 점이 하나둘씩 발견됐다.
사건을 담당한 한 형사는 “집안을 뒤진 흔적은 있었지만 뭔가 엉성하고 살해 방법도 조금 어설퍼 보였다. 특히 최씨가 외출할 때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나간 것이 가장 수상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원래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현관문을 잠그지 않는다. 평소 남편이 ‘내가 집에 있는데 뭐하러 문을 잠그느냐’고 말해 그날도 현관문을 열어둔 채 집을 나섰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씨 집의 현관문은 전자개폐식이어서 문을 닫기만 하면 저절로 잠기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현관문을 살짝 열어놓고 외출했다는 최씨의 얘기를 경찰로서는 믿기가 어려웠다. 또한 최씨가 살림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1억원이나 되는 남편의 보험금을 청구도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것도 경찰의 의심을 샀다.
또한 최씨의 휴대폰 통화 내역을 조회한 결과 또 다른 단서가 발견됐다. 사건 당일은 물론, 지난 10개월간 최씨가 수십 차례 박씨 등과 통화한 내역이 나오는데 사건 발생 후에는 한 번도 통화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 경찰은 이런 점들을 종합해 최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벌인 끝에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전모를 파헤치고 최씨와 박씨 일당을 전원 검거할 수 있었다.
한 수사관계자는 “처음엔 설마 최씨가 남편을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최씨는 아주 여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주변에서도 살림 잘한다고 평판이 좋았다. 박씨와 그 친구들도 이런 일을 하기엔 겁도 많고 평범한 20대에 불과했다. 박씨 일당이 단지 돈 몇 푼에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