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이 사건은 전혀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1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던 아들이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 취재 결과 아들은 당초 범행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던 것과는 달리 아버지와 변호인을 만난 이후부터 종전의 범행 자백을 뒤집은 것으로 밝혀졌다.
1심 법원은 아들이 당초의 자백을 번복하는 진술을 인정하지 않은 채 징역 2년을 선고했지만 지난 10일 항소심에서는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사건은 일 년 만에 새로운 국면을 맞은 셈이다.
아들은 왜 진술을 번복했을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에 결정적인 기준이 된 근거는 무엇일까. 아들이 범인이 아니면 진범은 누구일까. 사건을 재추적해 본다.
이 사건은 2005년 2월,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인터넷 심부름 카페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 카페 운영자에게 청부 살인을 요청한 의뢰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변심한 남자친구를 불구로 만들어 달라’, ‘처자식을 죽여 달라’는 등의 끔찍한 주문들이 가득 들어있던 ‘제거 전문킬러’라는 이름의 인터넷 심부름 카페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다행히 이 카페의 운영자인 김아무개씨(30)는 의뢰인들에게 전문 킬러 행세를 한 ‘사기꾼’에 불과했지만(김씨는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김씨에게 청부 살인을 요청한 의뢰인들은 ‘살인예비’죄의 무거운 형벌 대상이 됐다.
경찰은 김씨의 계좌를 추적하다 모 대학 교수인 김아무개씨를 죽여달라며 사례비를 송금한 한 모자의 실체를 밝혀냈다.
수사 결과 이 모자는 교수인 김아무개씨의 아내 박아무개씨(당시 49세·사망)와 아들 김아무개씨(26)로 드러났다. 이들 모자는 곧장 수사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경찰 수사가 좁혀오던 지난해 2월28일 돌연 자살을 했고 아들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긴급 체포됐다.
아들은 경찰에서 “어머니가 다단계 회사에 다니면서 많은 빚을 지게 됐고 아파트 담보 대출로 1억3천만원을 갚고도 8천만원이 남아 괴로워했다”며 “평소 사망 후 재산을 모두 사회에 기증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아버지를 살해하고 보험금과 유산으로 돈을 갚자는 어머니 말에 동의했다”고 자백했다. 평소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했고 거액의 빚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불쌍해 범행에 가담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당시 경찰은 아들 김씨와 카페 운영자의 진술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범행 내용을 발표했다.
2004년 12월29일. 어머니 박씨는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심부름 카페 운영자인 김씨와 접촉했다. “채권자에게 쫓기고 있으니 제거해 달라”는 어머니 박씨의 요청에 김씨는 “채권자를 피해 중국이나 일본으로 도피시켜 줄테니 2백20만원을 지불하라”고 했다.
다음날 아들 김씨가 인터넷 뱅킹으로 어머니의 은행 계좌에서 청부업자의 계좌로 1백70만원을 이체했다.
2005년 1월6일. 처음과 같은 아이디로 누군가가 메신저에 접속, 카페 운영자 김씨에게 “박씨의 친인척이다. 지금 첫 의뢰자는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끌려간 상황이다. 교통사고를 위장해 채권자를 살해해 달라”고 요청했다. 더불어 살해 대상으로 아버지 김씨의 이름과 주소, 차량번호 등을 알려주었고 이동 경로에 대한 정보까지 제공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나자 다시 카페 운영자 김씨에게 메일이 왔다. 이는 후에 어머니 박씨의 메일 주소로 확인됐다. 사제폭탄을 구해 살해 대상이 살고 있는 지방으로 보내달라는 것. 당시 아버지 김씨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지방에 살고 있었고 아들만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아들은 폭탄 구입비조로 60만원을 전과 같은 방법으로 두 차례에 걸쳐 어머니의 계좌에서 카페 운영자 김씨에게로 계좌 이체했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져 아들 김씨는 구속됐고 김씨도 경찰에서 이를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서로 달려온 아버지와 아들이 만난 후 상황은 반전됐다. 아들이 “어머니의 부탁으로 돈을 송금한 적은 있으나 범행에 가담하지는 않았다”며 진술을 전면 번복했고, 아버지는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이루어진 경찰의 강압수사의 결과”라며 법원에 탄원서까지 냈다.
이후 아버지 김씨는 아내가 자살하기 30분 전 자신 앞으로 쓴 유서를 발견해 냈다. 이 유서는 당초 경찰 수사를 상당부분 뒤집을 수도 있는 계기가 됐다. 어머니는 유서에 “흥신소에 보내는 건지 몰랐다”는 등 정체불명의 흥신소를 언급했고 “계좌 이체가 큰 잘못이다. 그 연관 때문에 아들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정말 관련은 없는데 한 번만 도와주면 된다는 말에 뒤집혀 그러고 말았다”며 이 사건과 관련된 ‘제3의 손’이 숨어있는 듯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글들을 남겨 놓았다.
수사에 의혹이 제기되자 경찰은 “강압수사는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아들의 단독 범행일 가능성도 있다”며 아들의 갑작스런 진술 번복을 의심했다. 그 근거로 경찰은 심부름 카페 운영자인 김씨의 진술을 들었다. 김씨는 “의뢰인이 교통사고 위장 살해를 요청했을 때 처음에는 살해 대상자인 김씨(아버지) 외에 그 부인까지 모두 제거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거절했더니 다시 김씨만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당초 의뢰인은 아버지 김씨와 어머니 박씨 두 사람을 모두 살해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사망한 데다 아들조차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초 재판부는 아들의 송금 사실과 청부살인을 의뢰받은 카페 운영자 김씨의 진술에 무게를 두었다.
카페 운영자 김씨는 경찰 조사 및 법정 진술을 통해 두 번째 메신저 접속 때부터 어머니 박씨의 친인척이라고 소개한 의뢰인을 아들 김씨로 단정했다. 사제 폭탄을 주문하는 메일을 보낸 다음날 이 의뢰인과 채팅을 했는데 사제폭탄 제조업자와 직접 연결해 달라며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도 가르쳐 주었다는 것. 그리고 이 의뢰인과 직접 통화까지 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 의뢰인이 폭탄 배달을 재촉하기까지 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아들은 “어머니가 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나중에 확인이 필요할 때에 내가 부탁하면 확인 좀 해달라’고 말했다. 궁금해서 전자우편 편지함을 열어보니 폭탄을 대전으로 배송해 달라는 말이 있어 깜짝 놀랐고,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배달이 되면 큰일 나겠다 싶어 우선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집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준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카페운영자 김씨로부터 두 차례 전화를 받았지만 자신이 사제 폭탄을 재촉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아들의 해명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살해해 줄 것을 의뢰하는 등 죄질이 불량하고 이미 자살해 고인이 된 어머니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가려는 등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지난 10일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아들의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 판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근거는 메신저 접속 IP주소 기록이었다.
카페 운영자 김씨는 메신저를 통해 의뢰인과 채팅을 해왔다고 진술했다. 그 기간은 2004년 12월29일부터 2005년 1월14일경까지. 그러나 정작 김씨가 접촉했다는 어머니 박씨의 아이디 접속기록은 그 기간에는 전혀 없었고 이후인 2월13일부터 3월1일까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마지막 접속기록이 있는 3월1일은 자살한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어 아들 또한 메신저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이 점은 아들도, 어머니도 아닌 ‘제3의 손’이 이 아이디로 접속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일 수 있었다.
재판부는 또 “아들이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하고 있고 아들의 변명처럼 송금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돈을 송금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아버지를 청부 살해하려 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의 이러한 판결은 사건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살해 모의는 있었는데 누가 누구와 했는지 그 뚜렷한 혐의자는 오리무중인 셈이다.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2심 판결이 뒤바뀔 가능성이 낮아 자칫 이 사건은 영원한 미궁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 사건에 남아 있는 꼭 밝혀야 할 의문점은 명확하다. 메신저에 접속해 청부 살인을 의뢰한 사람의 정체다. 범행을 모의했던 시기에 카페 운영자 김씨의 메신저 접속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들이 아니라면 아들에게 돈을 송금하도록 부탁한 어머니의 단독 범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새롭게 사건의 실마리를 풀 단서로 떠오르는 것은 이들 모자의 당초 범행 동기로 추측됐던 부채 8천만원의 실체다. 이 돈을 받을 ‘채권자’의 존재가 이번 사건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수사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어머니 박씨가 유서에서 언급한 흥신소의 정체도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 충분한 수사가 이루어진 바가 없다.
죽은 어머니는 말이 없고 아들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리고 채권자의 존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고, 카페운영자 김씨의 진술도 한계가 드러났다. 수사당국도 손을 떼겠다는 입장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아버지 청부 살해 기도 사건은 이처럼 원점으로 되돌려지고 만 것이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