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치범들은 수갑까지 이용해 경찰을 사칭, 사업가 A 씨를 끌고갔다. 사진은 실제 압수된 증거물품. | ||
100억대 부자로 알려진 A 씨가 이날 체포된 것은 아내와의 재산 분쟁 와중에 처남을 청부살해하려 한 혐의 때문. 그러나 여기에는 청부 대금 문제로 ‘의뢰인’이었던 A 씨가 ‘청부업자’들에게 납치·폭행을 당하는 영화 같은 일이 함께 엮여있기도 했다. 자칫 묻혀버릴 뻔했던 이번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 역시 A 씨와 청부를 맡은 공범들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찰 조사에서 A 씨는 “손 좀 봐주라고 부탁한 건 맞지만 살해를 청부한 적은 없다”며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A 씨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잠시 시침을 1년 6개월 전으로 돌려보자.
2006년 1월 31일 경찰에 한 통의 범죄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신고자는 다름 아니라 재력가로 알려졌던 A 씨. 자신이 경찰을 사칭하는 괴한들에게 납치돼 어디론가 끌려간 뒤 집단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A 씨는 “수갑을 차고 눈을 가린 채로 끌려갔기 때문에 납치된 장소가 어딘지는 모른다”며 “돈을 요구하는 범인들을 내 사무실로 유인해 겨우 도망을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납치 장소에서 자신의 대전 사무실로 돌아가던 도중 톨게이트 요금이 4300원이라는 말을 들은 것밖에 없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처음 사건을 접수한 대전 둔산경찰서 강력 3팀은 곧바로 수사를 시작했다. 단서는 A 씨의 최초 진술뿐이었고 달리 목격자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수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피해자 A 씨의 태도였다. 보통 피해자들은 자신이 당한 일을 상세히 경찰에 밝히고 도움을 얻으려 하는데 A 씨는 그렇지 않았던 것.
형사들은 처음에는 ‘A 씨가 돈이 많은 사람이라 신분노출을 꺼려서 그러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사를 진행하면서 형사들은 납치범들과 A 씨 사이에 뭔가 석연치 않은 관계가 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일단 형사들은 “톨게이트 요금 정산소에서 4300원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A 씨의 얘기에 초점을 맞춰 대전 지역의 모든 톨게이트를 조사했다. 인근에서 대전까지의 톨게이트 요금이 4300원인 곳은 모두 두 지역. 형사들은 이들 두 지역 톨게이트의 CCTV를 분석해 사건 발생 즈음에 해당 지역을 빠져나간 차량 중 수상한 차들을 추려냈다.
이를 토대로 형사들은 모두 여덟 번에 걸쳐 용의선상에 오른 차량 소유주들을 만났으나 이들은 모두 A 씨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형사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국 수사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CCTV 화면을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장면을 발견하게 된 것. 예의 화면 속에선 어두컴컴한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한 남성이 얼굴을 가린 채 승용차에 타고 있었다. 형사들은 화면 속 인물이 A 씨 납치사건의 용의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차량 소재지를 파악했다.
문제 승용차의 소유주는 특수강도 등 전과 5범인 Y 씨(42)로 밝혀졌다. 하지만 의심만으로 Y 씨를 검거할 수는 없었다. 형사들은 납치사건 범인들이 형사를 사칭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Y 씨의 거주지 인근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을 경찰관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인물’을 본 적이 없는지 탐문하기 시작했다. 결국 형사들은 유사휘발유 장사를 하는 한 업주에게서 단초가 될 만한 진술을 확보했다.
이 업주는 “흰색 포텐샤 두 대를 끌고 시너를 넣으러 온 두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옆 사람을 가리키며 ‘앞으로 이 형님 말 잘 들어라. 이 분이 형사인데 말 안 들으면 단속 나와서 장사 못하게 하는 수가 있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형사들은 업주에게 Y 씨의 사진을 보여주고 “경찰이라고 했던 그 사람이 맞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형사들은 우선 경찰을 사칭한 혐의로 Y 씨를 검거했다. 또한 Y 씨 검거과정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갑도 확보할 수 있었다. 형사들은 납치사건의 진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Y 씨의 사진을 들고 피해자 A 씨를 찾아갔다. 하지만 A 씨는 이번에도 경찰의 수사진행을 막았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형사들이 병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 A 씨는 사건 담당 경찰서의 수사과장이 나서고 나서야 비로소 사진 속의 Y 씨가 자신을 납치한 범인이 맞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형사들은 Y 씨를 납치강도혐의로 구속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또한 톨게이트 CCTV 화면에 Y 씨와 함께 등장한 K 씨(41) 등을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형사들은 이번 사건이 단순 납치강도 사건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A 씨 납치사건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게 된 것은 Y 씨가 검찰에 송치되던 당일, 공범 K 씨의 입을 통해서였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K 씨는 “A 씨로부터 처남을 살해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범행을 했지만 죽지 않자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고 A 씨를 납치했던 것이다”고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K 씨 등이 뒤늦게 밝힌 바에 따르면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과거 A 씨는 이런저런 사업 등을 하면서 얻은 은행 빚으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신분으로 땅을 구입할 수 없었던 A 씨는 부인의 명의로 대전의 한 지역에서 부동산을 매입하게 된다. 그런데 얼마 뒤 해당 지역에 재개발 열풍이 불면서 부동산 가격이 수십 배로 치솟아 그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된다.
A 씨가 부동산 재벌이 된 지 몇 년 후 그의 부인이 자신의 오빠 H 씨(51)에게 뜻밖의 전화를 건다. ‘내 명의로 된 대전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20억만 대출을 좀 받아 달라. 그리고 남편 A 씨와 이혼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A 씨의 부인은 ‘남편이 평소 의처증이 심해서 자신을 괴롭혀 왔으며 오랜 기간 상습적으로 폭행을 해왔다’며 하소연을 했다.
동생이 남편과 사이좋게 잘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던 H 씨로서는 동생의 얘기에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H 씨는 동생의 요구대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A 씨는 부인이 부동산 담보대출을 신청한 사실을 은행직원의 귀띔으로 알게 됐다. 또한 대출신청을 대신해준 대리인이 처남인 H 씨라는 사실도 파악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A 씨는 2005년 가을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재산분할신청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하지만 재판에 패소할 경우 부동산이 전부 부인 앞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한 A 씨는 결국 부인에게 20억 원을 주기로 하고 이혼에 합의한다.
그러나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돈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얼마 뒤 A 씨는 자신이 잘 알던 후배(46)와 술자리를 함께하다가 “부인에게 20억을 주는 게 너무 아깝다. 이게 다 부인의 오빠가 종용한 일이다”라며 처남 H 씨를 상대로 ‘모종의 범행’을 해줄 사람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후배는 “일이 잘되면 중국에 술집을 차려주겠다”는 말을 듣고 A 씨에게 ‘전문가’라며 한 사람을 소개해줬는데 그가 바로 Y 씨였다.
A 씨는 Y 씨를 직접 만나 “일을 성사시키면 1억 원의 사례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A 씨가 의뢰한 ‘모종의 범행’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현재 Y 씨 등은 “A 씨가 H 씨를 죽여 달라고 했다”고 진술하는 반면 A 씨는 “단지 처남을 손 좀 봐달라고 했을 뿐”이라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다.
▲ 납치범들의 현장검증 모습과 공범들이 사용하고 버린 휴대폰(아래). 수사 협조에 소극적이었던 피해자 A 씨는 처남 살인 교사 혐의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 ||
Y 씨 일당 4명은 H 씨가 살고 있는 대구로 내려가 범행을 모의했다. 이들의 범행 계획은 꽤 치밀했다. 나중에 용의자로 체포되더라도 휴대폰 위치추적 결과를 오히려 알리바이로 이용할 수 있도록 다른 장소에 자신들의 휴대폰을 놔뒀을 정도였다. Y 씨 일당은 팀을 둘로 나눠 H 씨의 집 앞과 뒤에서 동태를 살피며 무전기를 사용해 서로 연락을 취했다.
며칠 뒤인 2005년 8월 31일 결국 Y 씨 일당은 절호의 범행 기회를 잡게 된다. 이들은 등산 갔다가 술에 취해 밤늦게 귀가하는 H 씨의 뒤를 몰래 따라가 쇠파이프로 머리를 가격하고 H 씨의 휴대폰을 가지고 도망을 쳤다.
경찰에 따르면 Y 씨 일당은 H 씨의 휴대폰을 가져간 이유에 대해 “A 씨가 H 씨에게 범행을 한 증거로 그의 휴대폰이나 지갑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찰 조사결과 Y 씨 일당은 범행 후 달아나던 중 휴대폰 위치추적을 우려해 대구 동구 효목동의 한 화분 밑에 H 씨의 휴대폰을 부서뜨린 채로 유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사건으로 H 씨는 두개골이 골절되는 등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H 씨 습격사건’ 이후 Y 씨 일당은 ‘의뢰인’인 A 씨에게 돈을 요구했다. 하지만 석 달 동안의 끈질긴 요구에도 A 씨가 약속했던 1억 원을 주지 않자 Y 씨는 또 다른 범행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A 씨를 납치해 돈을 강탈할 계획을 꾸몄던 것. Y 씨는 과거 H 씨 사건을 함께 저질렀던 공범 4명에다 새로운 인물 1명을 더 가담시켰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모두 교도소 동기인 것으로 드러났다.
A 씨를 노린 Y 씨 일당의 범행은 그들이 H 씨에게 했던 수법과 판박이였다. 이번에도 Y 씨 일당은 자신들이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를 경우 위치추적을 당할 것에 대비해 휴대폰을 다른 장소에 두고 범행을 시도했다. 또한 서로 무전기로 교신하며 몇 달 동안이나 A 씨의 동선을 파악했다. 그러던 중 지난 2006년 1월 31일 Y 씨 일당은 결국 A 씨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Y 씨 일당은 지하주차장에서 자신의 차에서 빠져나오는 A 씨를 발견하고 A 씨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는 “경찰인데 당신을 연행하겠다”며 양손에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린 채 A 씨를 자신들의 차에 태웠다.
Y 씨 일당은 국도를 이용해 천안 성정의 한 폐교 지하실로 A 씨를 끌고 간 뒤 집단폭행을 했다. 또한 A 씨의 지갑에 있던 현금과 4000만 원가량의 손목시계를 강탈했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Y 씨는 A 씨를 구타하는 과정에서 눈가리개를 풀어주고 자신이 납치한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결국 A 씨가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은 Y 씨가 잡힐 경우 자신이 의뢰한 범행이 알려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던 셈이다.
납치됐던 A 씨가 빠져나오는 과정도 드라마틱했다고 한다. 당시 계속된 구타에 두려움을 느낀 A 씨는 Y 씨 일당에게 “사무실에 데려다 주면 20억 정도 되는 양도성예금증서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귀가 솔깃했던 Y 씨 등은 A 씨를 차에 태우고 다시 대전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함께 갔다.
사무실에 도착한 A 씨는 Y 씨 일당이 한눈을 파는 틈을 타 기지를 발휘, 재빨리 사무실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이에 놀란 Y 씨 등은 이내 줄행랑을 쳤고 A 씨는 곧바로 경찰에 납치당했던 사실을 신고했던 것이다.
이 같은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게 2006년 2월 12일. 형사들은 곧바로 A 씨의 출국금지 신청을 하고 그를 검거하기 위해 A 씨 집으로 출동했다. 하지만 이미 집 안에선 A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는 데 대해 불안감을 느끼던 A 씨가 이틀 전 한 여인과 함께 서둘러 필리핀으로 떠났던 것. 경찰은 인터폴에 요청해 적색수배까지 내렸지만 1년 4개월여 후인 지난 6월 19일에야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던 A 씨를 체포할 수 있었다.
현재 살인교사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된 A 씨는 “청부를 한 것도 맞고 범행을 실행에 옮기라고 윽박을 지른 것도 맞지만 살인을 요구한 게 아니라 단지 손을 좀 봐달라고만 했다”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검찰 측에서는 Y 씨 등의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점과 만약 A 씨가 단순 폭행을 교사했다면 청부를 받은 Y 씨 일당이 H 씨가 죽을지도 모를 쇠파이프를 범행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을 토대로 A 씨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한편 경찰에 따르면 A 씨와 당시 부인은 이미 이혼한 상태. 청부 대상이 됐던 H 씨는 자신에 대한 범행을 교사한 사람이 매제였던 A 씨임이 밝혀지자 “단순 뻑치기 강도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사돈을 맺었던 사람이 그럴 수가…”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A 씨는 살인교사, Y 씨 일당 등 6명은 살인미수 및 강도상해 혐의로 기소돼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반면 A 씨의 납치강도 범행에 가담하고 A 씨의 시가 4000여만 원가량의 시계를 강탈해간 것으로 알려진 또 한 명의 공범은 아직도 도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이번 사건이 A 씨의 주장처럼 청부 상해(상해교사)로 판결이 날지, 아니면 윤 씨 일당들의 진술대로 청부살인 미수(살인교사)로 판결이 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