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박계가 새누리당 지도부를 장악함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이 당·청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2월 25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새누리당 제2차 상임전국위원회에 참석한 유승민 원내대표(왼쪽)와 김무성 대표가 귀엣말을 하는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이로써 새누리당은 이른바 ‘KY(김무성·유승민) 투톱 체제’가 완성됐다. 박근혜 정부 주류였던 친박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정치권에선 친박을 ‘침박(침몰한 친박)’이라고 부를 정도다. 이는 곧 집권 3년차를 맞은 박 대통령 국정운영에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당·청 관계에 대한 장고에 돌입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특히 여권 핵심부 주변에선 김무성 대표와의 관계 재설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지난 2013년 12월 당시 김무성·유승민 의원은 나란히 박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김 의원은 12월 19일 대선 1주년 기념식에서 “당 인사들이 배신감을 느끼지 않도록 지도부는 청와대와 담판을 지어주기 바란다”며 박 대통령 인사 방식에 대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열흘 뒤 유 의원 발언은 더욱 강도가 셌다. 유 의원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던 수서발 KTX 노선 자회사 설립에 대해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잘못된 정책으로 박 대통령을 잘못 이해시키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청와대는 김무성·유승민 의원 공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은 ‘황우여 대표-최경환 원내대표’를 필두로 친박계가 장악하고 있었고, 박 대통령 지지율 역시 60%를 넘기며 고공행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얘기다. 일부 친박 의원들은 둘을 가리켜 “논공행상에서 소외되자 딴죽을 걸고 있는 것”이라며 불쾌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정치권이 한때 ‘원조 친박’이었던 둘을 본격적으로 ‘비박’ 범주에 포함시킨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그로부터 7개월 뒤 김 의원은 당대표가 됐고, 유 의원은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청와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유 원내대표는 취임하자마자 박 대통령 대선 공약인 ‘증세 없는 복지’의 궤도 수정과 대대적인 인적쇄신을 요구했다. 김 대표 역시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번엔 1년여 전과 그 무게감이 확연히 달랐다. 의석수 과반이 넘는 집권당의 대표와 원내대표 발언이었다. 청와대는 불쾌해하면서도 당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새누리당 주변에선 당·청 관계에 있어서 당이 처음으로 우위를 점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김무성-유승민 조’가 기선제압에 성공한 셈이다.
유 원내대표는 그동안 박 대통령과 날선 대립각을 세웠던 인사다. 청와대가 기대했던 ‘예스맨’은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정치적 행보가 유 원내대표 승리를 견인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는 유 원내대표가 청와대를 향해 당분간은 강경 스탠스를 유지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 원내대표가 대표적 친이계 인사인 조해진 의원을 원내수석부대표로 임명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당초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핵심부는 원내수석부대표에 몇몇 친박 의원을 강력하게 추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유 원내대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비박계는 새누리당을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3년 4월 총선 직후 소속 의원 155명 중 100명 정도가 범 친박으로 분류됐지만 지금 그 수는 절반도 채 미치지 못한다는 게 정치권 분석이다. 최고위원 분포만 보더라도 서청원·이정현 최고위원을 제외하곤 모두 비박계다. 그나마 원내지도부엔 친박이 한 명도 없다. 당 지도부가 비박 일색으로 짜인 셈이다. 정치권에선 이러한 친박의 급격한 세력 약화가 박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각에선 레임덕까지 거론되고 있다. 아직 임기 3년차인데도 말이다. 그만큼 이번 원내대표 선거 패배는 박 대통령에게 치명타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앞서의 친박 중진 의원은 “박 대통령이 친박이라는 정치적 계파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안정적인 지지율을 바탕으로 한 대중성 때문이었다. 이는 박 대통령에게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지율이 빠지자 친박계 로열티가 무너지고 있다. 어차피 국회의원들은 다음 총선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친박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어 할 것”이라면서 “지난해 당에서 치러졌던 주요 선거(국회의장 선거, 서울시장 경선, 전당대회)에서 모두 비박계에 패배한 데 이어 원내대표까지 내줬으니 친박이 무너지지 않고 견딜 방법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그동안 대화 테이블에서 공공연히 배제됐던 김무성 대표의 정치적 입지를 인정해주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김 대표와의 관계 회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당청 소통 강화의 일환이라는 성격이 짙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도 “수첩 파동을 비롯해 김 대표와 여러 오해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신년기자회견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언제든 김 대표와 만날 수 있다는 게 박 대통령 생각”이라면서 “박 대통령이 김 대표와 직접 만나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기회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여권 핵심부가 다른 속내를 품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들린다. 한 배를 탄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의 간격을 떨어트리려는 의도가 담겨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엔 ‘차기’를 노리고 있는 김 대표가 아직 임기를 3년 가까이 남긴 현직 대통령과 전면전을 벌이진 않을 것이란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박 대통령과 친박에게 김 대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임엔 분명하다. 그런데 박 대통령 국정 운영과 또 내년 총선을 생각하면 김 대표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김 대표 역시 지금은 박 대통령과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지난해 개헌론 발언 때를 보면 알겠지만 청와대와 갈등이 고조되면 항상 한 발 빼지 않았느냐”면서 “박 대통령으로선 김 대표와 어느 정도 협력하면서 유 원내대표를 견제하는 스탠스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