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외주 제작사들은 입을 모은다. 케이블 채널과 종합편성채널의 영향력이 커졌지만 여전히 제작사들의 로망은 지상파다. 결국 그들은 지상파 편성을 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배우들이 캐스팅을 제안 받았을 때에도 가장 먼저 묻는 건 “편성은 받았냐?”다. 편성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덜컥 출연을 결정했다가 편성이 불발되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상한 시기에 방송되지 못하고 편성이 밀리면 수개월간 허송세월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배우들은 편성을 받은 드라마를 위주로 고르려 한다.
<하이드 지킬, 나>의 현빈과 드라마 <킬미 힐미> 속 지성(왼쪽)과 황정음. 사진제공=SBS, KBS
반면 제작사가 방송사에 편성을 받으러 들어가면 “누가 출연하냐?”고 묻는다. 시청률에 목숨을 거는 방송사 입장에서는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편성을 주기 전 주연 배우가 누군인지를 먼저 체크한다.
편성 여부와 스타의 출연 여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명제와 비슷하다. 일단 편성이 결정된 드라마는 다 차려진 밥상과 같기 때문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밥상을 차리는 단계부터 참여하는 배우는 드물다. 밥과 반찬은 다 만들어놨는데 이를 올릴 밥상을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배우 현빈을 둘러싼 SBS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와 MBC <킬미 힐미>의 대립은 방송 관계자들을 넘어 대중들에게도 꽤나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현빈은 소위 말하는 ‘편성이 나오는 배우’다. 그가 출연하기로 결정만 하면 지상파 편성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의미다. 이민호 김수현 소지섭 조인성 등이 이 반열에 오른 배우들로 분류된다.
<시크릿 가든> 이후 현빈을 섭외하려고 대부분 제작사들이 4년간 공을 들였다. <킬미 힐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를 품은 달>을 쓴 진수완 작가의 차기작으로, 이미 MBC 편성도 받아놓은 터라 현빈은 좋은 조건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빈이 출연을 고사한 뒤 뒤늦게 캐스팅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사가 보도됐고 <킬미 힐미>의 제작사가 “제안조차 한 적이 없다”고 대응하자 현빈 측이 “대본까지 받아서 봤다”고 반박하며 양측이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황상 <킬미 힐미> 측이 현빈에게 출연을 제안한 건 맞다. 그렇다면 왜 제작사는 무리수를 띄우며 이 사실을 극구 부인했을까. 다른 스타를 섭외해야 하는 상황에서 ‘현빈이 거절한 드라마’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결국 <킬미 힐미>는 이승기를 거친 후 지성을 주연 배우로 낙점하며 캐스팅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현빈은 공교롭게도 동시간대 방송되는 SBS <하이드 지킬, 나>를 선택했다. ‘현빈을 놓친 드라마’와 ‘현빈을 잡은 드라마’의 맞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당연히 초반 무게감은 <하이드 지킬, 나>로 기울었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두 드라마의 관계자는 ‘너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특히 2주 먼저 방송을 시작해 방어를 해야 하는 <킬미 힐미> 쪽에서는 <하이드 지킬, 나>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했다”고 전했다.
결과는 <킬미 힐미>의 판정승이다. 초반에는 어깨를 견주는 수준이었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시청률 격차가 벌어졌다. <킬미 힐미>는 지성의 탄탄한 연기력이 호평 받으며 연일 시청률이 상승한 반면 <하이드 지킬, 나>는 연기력 논란에 진부한 스토리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며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드 지킬, 나>의 원작자인 이충호 웹툰 작가가 “<킬미 힐미>가 <하이드 지킬, 나>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또 다시 논란이 불거졌다. 양측이 이에 대해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을 밝히고 이 작가가 자신의 SNS 계정을 삭제하며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캐스팅에서 시작된 두 작품의 싸움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작품에서는 여배우 A를 둘러싼 밀고 당기기가 있었다. A는 당초 B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맡기로 하고 작가와 미팅까지 마쳤다. B 드라마는 이미 충분한 대본까지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 편성이 결정되면 곧바로 촬영을 시작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또 다른 C 드라마가 편성을 받으며 모든 상황이 틀어졌다. B 드라마의 제작사는 크게 당황했고, 방송 시작까지 시간이 촉박한 C 드라마의 제작사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매한가지였다.
결국 C 드라마는 B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스케줄을 비워두었던 A에게 손을 내밀었고 A는 그 손을 덥석 잡았다. A와 함께 다음 차례 편성을 엿보고 있던 B 드라마의 제작사로서는 빈정 상할 일이었다.
하지만 A는 이 드라마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남자 배우에 초점이 맞춰지는 드라마라 A의 역할이 조명 받지 못하는 탓이다. 또 다른 연예계 관계자는 “B 드라마가 곧 편성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리자 A의 소속사는 또 다시 출연을 검토해달라며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며 “편성을 보고 스타들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만 최소한의 상도의도 없는 행동은 업계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