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 성폭행 피의자 SBS 캡처화면. | ||
지난 7일 서울 서초경찰서는 여성들에게 약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뒤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하고 금품을 훔친 혐의로 공익근무요원 이 아무개 씨(21)와 김 아무개 씨(21·재수생), 유 아무개 씨(21·재수생), 최 아무개 씨(20·모델), 윤 아무개 씨(21·무직) 등 5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술집에 들어가기 전에 범행 장소로 쓸 모텔을 예약했으며 신고를 막기 위해 피해여성의 나체사진까지 찍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경찰은 이들이 여성을 유인하는 과정에서 환각성 약품의 일종인 속칭 ‘물뽕’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일부 부유층 자제들의 추악한 범죄행각을 뒤쫓아가보았다.
피의자 이 씨와 김 씨, 유 씨가 서로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입학에 실패해 재수학원에 다니면서부터였다. 서울 강남 일대에 살던 이들은 유명 국립대 교수와 중소기업체 대표, 대형 약국 운영자 등을 부모로 둔 부유층 자제들이었다. 학원에서 만난 이 씨 등은 유흥을 즐기는 스타일이 비슷해 금방 서로 마음을 터놓는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이들 세 사람은 자주 함께 어울려 다녔고 술집에서 알게 된 후배 최 씨와 윤 씨 등과도 친하게 지냈다.
강남의 클럽을 자주 드나들던 이들 피의자들은 연말 분위기에 한창 들떠 있던 2007년 12월 24일, 전에도 성공했던 수법을 이용해 여성들과 하룻밤을 보내려고 계획한다. 이들은 범행을 위해 서초동에 있는 H 모텔에 객실 2개를 예약한 뒤 자신들이 VIP 대우를 받는 서초동 N 클럽에 들어가 범행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 3시경 이들은 클럽에 놀러 온 A 씨(여·25)와 B 씨(여·23)에게 접근해 속칭 ‘부킹’을 했다. 경찰관계자는 “피의자들 대부분이 키가 180㎝가 넘을 정도로 훤칠했다”고 말했다.
A 씨와 B 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과의 ‘부킹’이 ‘악의 수렁’에 빠지는 입구인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와 김 씨, 유 씨 등은 A 씨와 B 씨 몰래 술에 약물을 섞은 뒤 두 여성에게 이를 마시게 해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이들은 예약해 놓은 모텔로 피해여성들을 끌고가 차례로 성폭행을 했다. 후배 최 씨와 윤 씨는 이들의 연락을 받고 모텔로 와서 집단 성폭행에 동참했다. 범행 후 이들 다섯 명은 피해여성들이 신고할 것을 우려해 휴대전화나 디지털 카메라로 피해여성의 나체사진을 촬영하기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탄절 새벽 끔찍한 일을 겪었지만 피해여성들은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약물에 정신을 잃어 경황이 없었던 데다 수치심 또한 컸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이들의 범행이 그대로 묻히고 제2, 제3의 유사한 범행이 계속될 수 있었던 상황. 하지만 이들의 엽기적인 범행은 유흥가에서 떠도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에 의해 꼬리를 밟히게 된다.
지난 12월 중순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2팀은 ‘약물을 이용해 여성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빈발하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에 들어갔다. 사건을 담당한 김희경 강력2팀장은 “첩보 입수 후 탐문수사 과정에서 어렵게 피해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였던 사건에 대해 다시 언급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에 경찰은 용의자들이 자주 나타나는 곳으로 보이는 강남 일부 호텔과 N 클럽의 방범용 CCTV 녹화테이프를 확보해 내용을 분석하는 한편 클럽 출입자들을 상대로 저인망식 탐문수사를 벌였다. 특히 CCTV 화면의 경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들과 함께 나가는 남성들에 주목했다. 경찰은 CCTV 분석과 탐문수사를 통해 마침내 용의자들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의 무대가 된 N 클럽은 강남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업소로 단골이 아니면 출입이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경찰은 잠입 수사 대신 클럽 주변에서 계속 잠복 수사를 펼쳐야 했다고 한다. 어렵사리 용의자들의 신원을 확인한 경찰은 지난 7일 김 씨를 최초로 검거하면서 범행에 관련됐던 나머지 피의자 4명을 순차적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 피의자 5명은 작년 9월부터 최근까지 N 클럽에서 3회에 걸쳐 같은 방법으로 외국인 여성 1명을 포함해 4명의 여성을 유인해 모텔에서 성폭행하고 피해여성들의 현금과 디지털카메라, 명품 핸드백 등 총 250만 원 상당의 물건을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훔친 물품 중 일부는 인터넷 경매를 통해 팔아 유흥비로 쓴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들의 휴대전화에 또 다른 외국 여성의 사진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추가 범행에 대해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피의자들은 대체로 범행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약 사범으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해서인지 최초 조사에서 “인터넷에서 구입한 ‘물뽕’을 술에 탔다”고 진술한 부분을 나중에 번복했다고 한다. 다른 범행에 대해서는 대부분 시인했지만 약물 사용에 대해서만은 부인하고 있는 것.
이에 경찰은 약물투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피해여성들의 소변 샘플에 대한 검사를 의뢰했고 10일 현재까지 결과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피해 여성들이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고 남성들과 똑같이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여성들만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아 약물투여의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피의자들 대부분은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부모들의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잘못된 욕망에 빠져 끔찍한 범행을 저질러온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처음에 피의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은 하되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피의자들의 부모가 자식의 잘못에 고개를 못 들었다”며 “하지만 (그런 부모들의 모습에) 피의자들이 뒤늦게 후회의 빛을 내비치고 있다”고 전했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