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신문>에서 입수한 정 씨의 폐차의뢰서. 자비까지 들여 폐차한 이유에 대해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 ||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수사관계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실제로 경찰 안팎에서는 두 어린이를 납치·살해한 정 씨가 ‘제 2의 유영철’을 연상케 하는 연쇄살인범일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정 씨가 2004년 군포에서 실종된 40대 여성도 자신이 살해했다고 자백하면서 경찰 수사는 그동안 미제로 남아있던 경기서남부지역 부녀자 연쇄실종사건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요신문>은 정 씨가 연쇄 살인범일 가능성을 보다 짙게 보여주는 정 씨의 폐차의뢰서를 단독입수했다. 이 폐차 의뢰서로 추정해 볼 때 정 씨는 2004년 자신의 에스페로 승용차를 이용해 몇 건의 범행을 저지른 후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서둘러 폐차한 것으로 보인다. 정 씨는 과연 연쇄 살인범인가. 경찰 수사를 따라가 본다.
정 씨는 22일 경찰 조사에서 2004년 군포에서 실종된 40대 여성도 자신이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정 씨가 2004년 7월 군포시 금정동에서 실종된 정 아무개 여인(당시 44세)을 금정동의 한 모텔에서 살해한 뒤 시흥 월곶 쪽의 다리에서 시신을 바다로 던져 버렸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아직까지 정 씨가 엇갈린 진술을 하는가 하면 범행을 특정 지을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 여러 다른 사건에 정 씨가 연루되어 있다고 확실히 단언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정 씨가 보인 엽기적인 범행행각을 토대로 볼 때 다른 사건들에 연루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다.
현재 경기 서남부 지역에 미제로 남아있는 사건은 총 5건. 발생지역 모두 경기 군포와 수원 등 정 씨가 거주하는 안양과 인접한 곳이다. 정 씨는 2004년 40대 여성 실종과 2005년 50대 여성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서도 당시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었다고 한다. 주목할 점은 정 씨가 거주지인 안양 외에도 인근 지역을 자주 넘나들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또 정 씨가 6년 동안이나 대리운전을 했다는 점은 그가 경기서남부 일대 지리에 밝은 인물이라는 것을 뒷받침 한다. 특히 정 씨가 2005년 인근 주민 K 씨(54)를 성추행하고 같은 해 12월 전화방 도우미 A 씨(53)를 집에서 성폭행한 인물이라는 점 역시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경찰은 정 씨로부터 2004년 군포 도우미 살해 사건에 대한 자백을 받아냄으로써 다른 사건과의 연계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최악의 경우 또 한 명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할지를 두고 내심 긴장하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일요신문>이 단독 입수한 정 씨의 ‘폐차의뢰서’는 정 씨의 범행과 관련해 많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어 관심을 끈다.
정 씨의 폐차의뢰서를 토대로 추적해 본 바에 따르면 정 씨가 자신의 차량을 폐차한 것은 지난 2005년 2월 18일. 정 씨가 자신의 차량을 폐차했던 시기는 ‘군포 도우미 실종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군포 경찰서는 2004년 8월 정 씨에 대해 첫 소환 조사를 실시한 이후 2006년 9월까지 약 2년 동안 ‘군포 사건’의 용의자로 정 씨를 조사했다. 그런데 정 씨가 두 번째 소환을 앞둔 2004년 9월 갑자기 ‘소재지 파악 불능 상태’가 된 것. 그 뒤 경찰이 정 씨를 찾은 것은 2005년 3월이었다. 무려 7개월간의 잠적이었다. 정 씨가 돌아왔을 때 그의 차량은 사라지고 없었다.
정 씨가 이처럼 잠적을 하고 또 서둘러 자동차를 폐차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은 정 씨가 잠적 후 자신의 차량을 폐차한 사실에 대해 “차량조사는 그전에 이미 철저히 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경찰이 군포 사건 발생 당시 정 씨의 차량에서 혈흔반응(루미놀) 검사를 한 것은 단 하루. 이번 안양 사건의 경우 정 씨의 집에서 최초 혈흔 발견 후 3가지 혈흔이 발견되기까지는 꼬박 열흘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당시 차량에는 경찰이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범행과 관련 중요한 단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 씨의 차량 폐차와 관련해 연쇄 살인의 의심이 가는 부분은 또 있다. 그가 경찰 조사 도중 잠적한 기간 중 화성에서 ‘여대생 피살 사건’이 발생했던 것. 지난해 12월 12일 화성 야산에서 낙엽에 덮인 시신이 발견됐다. 이 시신은 2004년 10월 27일 화성시 와우리공단 인근에서 사라진 노 아무개 씨(당시 21세)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 씨가 9월 경찰의 ‘그늘’에서 사라지자마자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차량이 없이는 접근하기 힘든 곳에서 시신이 발견된 점 등을 미뤄 용의자를 ‘택시 운전사’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역시 이 사건의 단서도 폐기된 차량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또한 정 씨가 굳이 자신의 차량을 자비를 들여 폐차했다는 점도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정 씨는 당시 경찰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대천에 가 있었다. 거기서 막노동을 했다”고 말했다. 결국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다는 것.
확인 결과 당시 정 씨의 차량은 93년식 에스페로. 한 중고차 매매센터에 2005년 당시의 93년식 에스페로 시세를 문의한 결과 “지금 시장에 남아있는 96년식 에스페로는 직거래로 30만~40만 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직거래를 했다면 최소 폐차비는 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 씨는 ‘막노동’ 일을 하며 경제적 사정이 벅찬 와중에 왜 하필 자비를 들여 폐차를 택했을까가 의문으로 남는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