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TN 캡처 화면. | ||
지난 24일 서울동부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함윤근)는 위임장을 위조해 재미교포 임 아무개 씨(여·79)의 부동산을 팔아 대금을 가로챈 혐의로 변호사 박 아무개 씨(52)와 차 아무개 씨(76) 등 2명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박 변호사는 2005년 차 씨를 미국 요양원으로 보내 임 할머니에게 접근, 재산관리인 위임장에 서명을 받고 허위 공증까지 받아 임 할머니가 소유한 서울 은평구 불광동 빌딩을 20억여 원에 제3자에게 팔아넘기고 계약금과 중도금 등 7억여 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임 할머니는 한국에서 수십년 전부터 한의사로 일하며 큰돈을 벌었으나 두 차례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 홀로 살아왔다. 임 할머니는 지난 2001년부터 치매증상이 나타나면서 코리아타운 내 한 노인병원에 입원했고 이 사실이 미주 한인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이 때부터 의붓아들 부부를 비롯해 여러 일당들이 임 할머니에게 접근하면서 임 할머니의 재산과 관련한 각종 소송들이 이어졌다.
치매노인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해 위임장 위조까지 서슴지 않았던 인면수심 일당들의 범행속으로 들어가봤다.
1929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임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터지던 당시 서울에서 한의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임 할머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57년에 한의사 자격증을 땄다. 불광동에 문을 연 한의원은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렇게 돈을 모으기 시작한 임 할머니는 64년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산과 밭을, 74년엔 한의원이 있던 불광동의 3층짜리 건물을 사들였다.
하지만 이런 임 할머니에게도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두 차례 결혼을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 그후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임 할머니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몇 차례 유학길에 올랐고 97년엔 60세가 넘은 나이로 혈혈단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국생활의 외로움 탓일까. 임 할머니는 서서히 기억력이 흐려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점점 기억력이 가물거리던 임할머니는 결국 치매에 걸렸고 급기야 지난 2001년 LA 시내를 정처없이 오가던 것을 LA경찰이 데려와 노인병원에 입원시켰다.
당시 미주 한인신문들은 임 할머니의 사연과 함께 적지 않은 재력가라는 사실도 보도했다. 이 때부터 임 할머니의 보호자 혹은 채권자임을 주장하는 한인들이 임 할머니가 기거하는 노인병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임 할머니와 이혼한 전 남편의 아들 부부를 비롯해 현지 한인 부동산업자, 사설 탐정 등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임 할머니와는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모두 임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노린 사람들이었다.
검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LA 부동산업자들 사이에서는 “미국에 있는 치매 할머니의 부동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까지 돌았다고 한다.
소식은 미주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전해져 한국에서도 아무개 변호사를 비롯해 여럿이 임 할머니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며 바다를 건너왔다. 이렇게 자신이 임 할머니의 보호자임을 주장한 사람들은 줄잡아 20명 이상이었다는 게 검찰 측의 설명이다.
사람이 늘어나자 결국 이 다툼은 법정으로 넘어가게 됐다. 2002년엔 양아무개 씨 등 3명이 채권자라고 주장하며 사기단을 조직했다가 검찰에 발각되기도 했다. 2003년 3월에는 임 할머니와 피 한방울 안섞인 전 남편의 아들 이 아무개 씨가 “어머니와 연락이 닿질 않는다”며 서울 가정법원에 부재자 재산관리를 신청하기도 했다. 특히 임 할머니의 재산을 노린 사람들은 임 할머니의 병원에 불쑥 찾아와 영문도 설명하지 않은 채 임 할머니로 하여금 이상한 서류에 도장을 찍도록 강요했고, 심지어는 병상에서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소송들은 대부분 기각됐다. 임 할머니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위임장을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고 증거로 내세운 사진들이 하나같이 임 할머니가 병상에서 함께 찍은 비슷비슷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박 아무개 변호사가 임 할머니로부터 위임장을 받아내 재산 일부를 팔아버렸다. 박 씨는 미국을 오가는 부동산업자를 통해 미주 일간지에 보도된 임 할머니의 사연과 재산 규모를 전해 듣고 평소 알고 지내던 차 아무개 씨를 미국 요양원으로 보냈다. 차 씨는 박 씨를 재산관리인으로 지정하는 내용의 위임장에 임 할머니의 사인을 받았다. 1만 1000달러(약1100만 원)를 주고 공증서도 만들었다.
박 씨는 200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임 할머니 소유의 임야와 건물을 신 아무개 씨에게 헐값(19억 원)에 팔아버렸다. 당시 임 할머니 소유의 건물만 해도 공시가로 20억 원을 훌쩍 넘을 정도였다. 그는 이 중 7억 원을 받아 챙겼다. 잔금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전등기도 마쳤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박 씨가 임 할머니로부터 받았다는 위임장이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임 할머니에 대한 재산소송이 끊이질 않자 LA의 유언검인 법정이 임 할머니에 대한 국선변호인을 신청했고 이 변호인단이 임 할머니의 재산 보호를 위한 조사에서 위임장 위조 의혹을 제기한 것. 변호인단은 “박 변호사가 임 할머니의 서명을 위조하기 위해 미국에서 공증인을 매수했고 한국에서 매매 절차를 쉽게 하려고 영주권자인 임 할머니를 시민권자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했다. 검찰에 따르면 미국에서 임 할머니 서명을 받았다는 공증인은 임 할머니를 만난 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증인이 임 할머니의 신분증에 나와 있는 ‘영주권’에 해당하는 영단어를 ‘시민권’으로 번역해 임 할머니의 체류신분을 시민권자로 바꿔 한국에서의 매매를 쉽게 했다는 것.
미국 법정에서 이 같은 논란이 벌어지면서 미국 측 임 할머니의 변호인단은 서울에 있는 지방법원에 임 할머니의 재산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면서 한국에서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2006년 이 소송이 진행되면서 당시 LA 경찰 측은 이 사건을 부동산 사기 사건으로 수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미국 법원은 지난해 “임 할머니가 서명한 모든 위임서류는 처음부터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임 할머니 측 변호인단이 서울지방법원에 신청한 가처분 신청에서도 법원은 지난달 28일 박 씨가 부동산 소유권을 넘겼던 신 아무개 씨 등에 대한 소유권 이전등기 및 말소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임 할머니의 손을 들어주었다.
임 할머니는 소송에서 승소해 잃어버렸던 재산을 고스란히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서 정작 임 할머니 본인은 잘 알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소송 소식을 전해듣고는 “내 재산을 누가 뺏냐”는 말만 했다고 전해진다. 임 할머니는 현재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지난 24일 구속된 박 씨는 검찰 측에 “차 씨는 계약금과 잔금 등을 모두 임 할머니에게 전달했다고 한결같이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임 할머니의 후견인은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나와 차 씨가 함께 떼어먹은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며 “나는 허위문서 작성에 가담한 적이 없고 대리인으로 보낸 차 씨를 믿고만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져온 서류가 어떻게 왜 위조됐는지도 모른다”고 반박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검찰에 처음 매매를 알선했던 이들과 임 할머니, 공증인을 불러 조사해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며 “알선자들의 말만 믿고 쌍방대리를 하면 수임료를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쉽사리 그들의 접근을 받아들인 게 큰 화근이 됐다. 그런데 검찰이 차 씨와 나만 조사하고 성급하게 사건을 끝내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 검찰 측은 “수백억 원의 자산가이면서도 정작 임 할머니는 미국에서 빚을 진 상태”라며 “친척이나 돌보는 이도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