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주범은 지난달 27일 입국하다 검거된 라이베리아인 K 씨(33). 그는 사건 당시 실제로 ‘먹지’를 ‘현금’으로 바꾸는 장면을 시연해 보였다고 한다. 그가 사용한 수법은 과연 무엇일까. 대체 어떻게 했기에 피해자가 먹지를 현금으로 만든다는 황당한 말을 믿게 됐을까. 이제부터 이 황당한 사기사건속으로 들어가보자.
천승현 씨(가명·65·무역업)가 K 씨(33)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6년 말. 무역업을 하던 탓에 해외를 자주 드나들었던 천 씨는 사업차 태국에 들렀다가 평소 친분을 쌓아왔던 이라크인 무싸 씨로부터 라이베리아인 K 씨를 소개받게 된다. 무싸 씨는 천 씨에게 “K는 이 지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재벌”이라고 소개한 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있는데 당신도 한번 투자해봐라”고 권유했다.
천 씨와 K 씨가 만난 그날. K 씨는 천 씨에게 보여줄 게 있다며 그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가 꺼낸 것은 현금 크기로 잘려져 있는 수십 다발의 ‘먹지’. 그는 “이것은 ‘블랙머니’라는 것으로 내가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다”라고 말했다. 천 씨는 먹지를 가지고 사업을 한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불과 몇 분 후에 천 씨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K 씨가 먹지 한 장을 꺼내놓고 약품을 뿌리자 이 먹지 위에서 몇 가지 문양이 천천히 나타나더니 얼마 후 미국 달러로 바뀐 것. 그곳에는 약품을 뿌리면 수만 달러를 만들 수 있는 먹지가 쌓여 있었다. 그는 천 씨에게 “내년 초 한국에 이 ‘마법의 돈’을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지난 2007년 초 한국에 들어온 K 씨는 천 씨를 서울 송파구의 G 호텔로 불러냈다. 그가 호텔에서 천 씨에게 내민 물건은 5kg짜리 트렁크 두 개. 가방은 모두 예의 그 ‘블랙머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천 씨에게 다시 한 번 마술을 보여줬다. 6~7개의 블랙머니 샘플을 꺼내 약품을 뿌리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먹지는 달러로 변했다.
▲ 블랙머니 사기는 달러에 미리 먹칠을 해놓은 후 약품을 이용해 지우는 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종방된 SBS 사기예방 프로젝트 <트릭>에서 블랙머니 관련 사건을 재연한 장면. | ||
그로부터 몇 개월 후(2007년 6월) 약품을 구하러 갔던 K 씨가 천 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처음 만났던 호텔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천 씨는 기대감에 부풀어 한달음에 호텔로 뛰어갔지만 실망스러운 답변을 듣게 됐다. K 씨는 “용액이 응고돼버려 먹지가 돈으로 바뀌지 않는다. 약품을 잘못 사서 다시 사야 한다”며 천 씨에게 “약품 값으로 1만 5000달러(약 1500만 원)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천 씨는 이번에도 그에게 돈을 줬다. 그러나 그 후로 그는 사라졌고 연락도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천 씨의 수중에 남은 것은 수백 다발의 먹지뿐. 천 씨는 지난해 7월 K 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K 씨는 이미 태국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게다가 K 씨는 위조여권을 가지고 입국했던 것으로 드러나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잡힐 것 같지 않던 K 씨가 지난달 27일 인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위조여권을 사용해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던 K 씨가 태국에서 붙잡혔고 한국의 범죄인 인도 요청에 따라 국내로 송환된 것. 사건 발생 1년 만의 일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송파경찰서 경제 8팀은 K 씨가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재입국하려다 잡힌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K 씨는 자신의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무싸의 심부름만 했을 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 반면 피해자 천 씨는 “무싸는 단 한번도 범행현장에 온 적이 없다. 모든 범행은 K가 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K 씨 역시 천 씨의 주장을 일부 인정해 결국 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K 씨는 구속된 후에도 진술을 거부하고 있어 그가 무슨 약품을 사용해, 어떻게 먹지를 달러로 둔갑시켰는지에 대해서는 경찰도 아직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찰 측에서는 현재 달러에 먹칠을 해놓은 후 약품을 뿌려 지우는 수법을 사용했거나 과거의 사건들처럼 옷소매에 달러를 감춰두고 있다가 감쪽같이 바꿔치기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