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던 경찰은 어린 중학생 소녀도 발견했다. “31시간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고 신고한 바로 그 소녀였다. 이 소녀 역시 눈을 감은 채였다.
이 비디오 테이프가 발견된 곳은 방글라데시인 A 씨(39)의 집이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이태원 일대를 돌며 여성들에게 마약을 먹여 잠재운 후 성폭행을 일삼아 온 혐의로 체포됐다. “내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면 대신 영어를 가르쳐줄 게”라는 그의 말에 속아 무려 20여 명의 여성이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13일 저녁 12시경 이 아무개 양(15·중2)은 이태원에서 귀가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이었던 탓에 인근에서 친구를 만나고 놀다보니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각이었다. 그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이 양 뒤로 한 남자가 조용히 다가섰다.
한 손에는 디지털 캠코더를 든 채로 이 양에게 인사를 건넨 이는 외국인이었다. 그는 서툰 한국말로 “외국에서 한국에 여행 온 관광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 한국말을 가르쳐주면 나는 너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말하며 이 양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이 양에게 “출출한데 햄버거나 먹으러 가자”고 권했고 이 둘은 인근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그의 이런 행동을 호의로 받아들인 이 양은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이 양은 그가 리필해준 콜라를 마신 후 곧바로 정신을 잃었고 ‘한참’ 후에야 깨어났다. 그러나 ‘한참’은 이 양의 생각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무려 31시간가량이 지난 후였다. 이 양이 의식을 잃은 사이에 하루 이상의 시간이 지나 깨어난 시각은 14일 오전 9시경이었던 것이다.
이 양이 깨어난 곳은 이태원 인근 지하철 역 앞. “한 여학생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들이 이 양을 깨운 것이었다. 이 양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양은 “여기 왜 쓰러져 있었느냐”는 주변인들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밖에 하지 못했다.
이 양이 자신이 당한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린 것은 그 다음날. 용산경찰서 강력 2팀을 찾은 이 양은 햄버거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진술하며 “그 외국인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반항하자 방망이로 폭행까지 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곧바로 이 양의 체혈검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이 양의 혈액에서 다량의 마약성분이 검출됐다. 경찰은 곧바로 이 양이 지목한 외국인 검거작전에 나섰다.
“외국인 관광객이다”라는 이 양의 진술만을 가지고 이태원에서 범인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는 상황. 경찰은 우선 이 양이 진술한 ‘기억이 끊긴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이름도 정확한 국적도 모르는 범인의 향방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성과없이 시간만 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경찰이 막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던 그때 근처 옥탑방에서 한 외국인이 우연히 경찰에 눈에 들어왔다. 이 양이 기억이 끊겼다고 지목한 곳이라 경찰은 순간적으로 ‘저 사람이다’ 싶었다.
경찰이 A 씨의 신분을 조회해 본 결과 그는 방글라데시인 ‘불법체류자’였다. 지난 1999년 한국에 입국한 A 씨는 2001년경 방글라데시로 한 차례 출국했다가 지난 2004년 초 다시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그해 12월 비자가 만료돼 출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난 2004년에도 성폭행 미수 혐의로 남대문경찰서에 한 차례 조사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한 여성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며 접근해 집으로 유인한 후 성폭행을 하려했지만 피해자가 “샤워를 하고 오겠다”며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도망치는 바람에 실패했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처벌되지 않았다. 신고한 여성이 신분이 드러날까봐 조사에 응하지 않아 경찰이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A 씨가 범인임을 확신한 경찰은 지난 17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의 한 형광등 조립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를 ‘약취 유인 및 감금, 성폭행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이 양도 “그가 범인이 맞다”는 대답을 해줬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이 양을 만난 것은 사실이고 약을 준 적도 있지만 성폭행을 하지는 않았다”며 “이 양이 머리가 아프다고 해 두통약을 준 것뿐”이라고 둘러댔다. 이 양의 기억이 온전치 못했던 탓에 결정적 증거가 부족한 상황.
그러나 A 씨의 거짓말은 금세 탄로 나고 말았다. 경찰이 A 씨 집을 압수수색한 결과 문제의 비디오테이프 16개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 증거를 찾아냈던 것. 놀라운 것은 이 비디오테이프에는 이 양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을 성폭행하는 장면도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 용의자는 적게는 1명, 많게는 3명까지 폭행하는 장면을 한 테이프에 담았는데 16개의 비디오테이프에 등장하는 피해여성은 모두 20여 명이나 됐다.
확실한 증거가 발견됐는데도 A 씨는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양에게 먹인 것으로 추정되는 다량의 향정신성 마약류 약품들이 자신의 집에서 발견되자 “예전에 방글라데시에서 들어올 때 두통약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비디오에 찍혀있는 다른 여자들은 나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비디오테이프에 담겨있는 여성들도 이 양과 마찬가지로 A 씨가 약을 먹인 후 성폭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여성들이 대부분 잠들어 있는 상태였고 깨어있는 사람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경찰은 이 테이프들이 암시장에서 거래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A 씨를 계속 추궁하고 있다. 또 비디오테이프 중간 중간에 지워진 흔적이 있는 점으로 보아 실제 피해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에 찍힌 여성들마저 피해사실을 부인하고 있어 이번에도 A 씨의 여죄를 모두 밝히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얘기가 들려 경찰을 애타게 하고 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