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북 청도경찰서 형사들은 먼저 시신의 신원확인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신의 얼굴이 불에 타버린 탓에 확인은 쉽지 않았다. 시신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곤 키가 145cm 정도에 13세가량의 남자아이라는 것과 사인이 질식사라는 정도. 경찰은 수사력을 총동원해 청도지역과 달성군, 수성구 일대를 ‘이’ 잡듯 뒤졌지만 허사였다. 시신을 발견한 지 열흘이 지나도 사건은 아무 진척이 없었다.
사건의 단서는 한 통의 전화였다. A 중학교의 한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가 실종됐는데 아버지가 가출했다고 하고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의심스럽다”는 제보를 해 온 것.
학교로 향한 경찰은 실종된 아이가 사용했다는 책과 공책 등을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로 보냈다. 얼마 후 국과수에서는 “공책에서 나온 지문과 시신의 지문이 일치한다”는 통보를 해왔다. 국과수의 통보를 받은 경찰은 아이의 아버지 김봉필 씨(가명·49·일용직)를 지난 8월 25일 긴급체포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6일 만의 일이었다.
처음 김 씨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나 그의 진술에 의심스러운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에 따르면 아이가 학교에 안 오기 시작한 시점은 지난 7월 30일.
하지만 김 씨는 아이가 8월 10일에 가출했다고 주장했다.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 날이 7월 29일이므로 김 씨의 진술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또한 아이가 가출한 지 한 달이 다 돼가도록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은 것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정황이 김 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버티던 김 씨는 체포 이틀 만인 지난 8월 27일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김 씨는 “아들의 목을 졸랐는데 죽을지는 몰랐다. 결코 죽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며 경찰에게 자신이 아들을 살해하게 된 과정을 털어놓았다.
김 씨가 살해한 아들은 13년 전인 지난 1995년 김 씨 부부가 직접 입양한 아이였다. 김 씨는 결혼한 지 6년여가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고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입양하게 됐다. 하지만 입양한 아들을 열심히 키워보겠다는 김 씨의 의지는 아내의 정신병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김 씨의 부인 이 아무개 씨(46)는 우울증과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김 씨가 아들을 살해한 날도 이 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이 씨는 아들을 입양한 직후부터 가출하는가 하면 정신병원에 입·퇴원 생활을 반복해오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졌고 그동안 아이에 대한 양육은 남편 김 씨가 모두 해결해오고 있었다. 낮에는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고 밤에는 집에 와 아이의 밥과 빨래 등을 챙기는 힘든 일이 이어졌지만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김 씨는 ‘아이만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없어도 될 아이를 왜 입양했을까’ 후회하는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김 씨의 이런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아이가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지도 않고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기 시작했고 간혹 눈을 부릅뜨고 대들기도 했다. 사춘기의 아이가 다 그렇다고 이해는 했지만 그럴수록 아이의 존재가 점점 더 부담스러웠다.
사건이 일어난 지난 7월 28일도 그랬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김 씨는 아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을 보고는 꾸중을 했다. 꾸지람을 들은 아이는 김 씨에게 대들기 시작했고 이 바람에 김 씨는 폭발하고 말았다. 홧김에 아이의 목을 졸랐던 것이다. 김 씨가 이성을 되찾았을 때 아이는 이미 숨이 멈춰 있었다.
겁에 질린 김 씨는 아이의 시신을 선풍기 커버로 씌우고 오토바이에 실어 집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복숭아밭으로 갔다. 김 씨는 그곳에서 신문지로 시신을 덮고 시너를 뿌려 불을 붙이고는 그대로 달아났다.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붙잡힌 김 씨는 경찰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십수 년을 힘들게 뒷바라지 하며 키워온 아이도 영원히 볼 수 없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