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공공의 적>의 한 장면. | ||
1993년 8월 23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OO동에 사는 이명자 씨(가명·47)는 이른 아침부터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편은 묵묵무답이었다.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이 씨는 번번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벌써 몇 시간째였다. 이 씨가 전화를 건 곳은 다름 아닌 친정집이었다.
친정이 있는 장위동과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긴 했지만 형편상 자주 들를 수 없었던 이 씨는 대신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부모님께 안부인사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열흘쯤 전부터 친정집에서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은 15년 전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일명 ‘장위동 살인사건’이다.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친정 부모님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씨는 불안해졌다. 처음에는 ‘두 분이 잠깐 어디 나가셨겠거니’ 생각했지만 하루 하루 지나면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는 데다가 일흔을 훌쩍 넘은 노인네들이 오랜 시간 집을 비울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같이 사는 동생부부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이 씨는 서둘러 친정이 있는 장위동으로 향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엄마, 저 왔어요’라고 말하며 집으로 들어섰지만 정작 집에는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집안에서는 알 수 없는 적막만이 감돌 뿐이었다. 집안 곳곳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살림살이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집안 곳곳에 감도는 냉기와 왠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집을 둘러보던 이 씨는 문간방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의문의 얼룩을 발견하게 된다. 검붉은 기가 도는 얼룩은 쌀부대에도 묻어 있었다. 마당을 살펴보던 이 씨는 더욱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앞마당을 누가 파헤쳤다가 덮어놓은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순간 이 씨의 머릿속에 불길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라고 직감한 이 씨는 즉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 씨의 친정 부모와 남동생 부부가 살고 있던 집은 3층짜리 복합건물이었다. 이들은 건물 1층과 2층의 한 켠을 살림집으로 개조해 생활해오고 있었다. 당시 이 건물엔 이 씨의 부모 외에도 남동생인 이장희 씨(가명·39) 부부와 그들의 딸(13) 등 일가족 5명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인근에는 막내 동생인 이충식 씨(가명·33)가 살고 있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일단 강도사건으로 추정한 수사팀은 집안 곳곳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고자인 이명자 씨의 말대로 앞마당에 누군가 땅을 팠다가 덮어놓은 흔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팀은 급히 이 씨네 집 앞마당을 파헤쳤다. 그리고 잠시 후 수사팀의 입에서 ‘이럴 수가’라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앞마당에서는 10대 소녀의 참혹한 사체가 발견된 것이었다. 다름 아닌 이장희 씨 부부의 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충격적이게도 소녀의 사체 밑에 노부부와 이장희 씨 부부의 사체 네 구가 줄줄이 묻혀있는 게 아닌가.
부모님과 동생 부부, 그리고 조카의 죽음을 확인한 이명자 여인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검시 결과 이들은 모두 머리 뒷부분과 이마에 둔기로 맞은 흔적이 있었다. 완벽한 타살이었다. 더운 날씨 탓에 사체는 심하게 부패돼 있었다. 부패상태로 보아 이들은 사망한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난 상태였다.
대체 누가 이들 일가족 5명을 잔혹하게 살해했을까. 수사팀은 우선 노부부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수사팀은 범인이 노부부의 어린 손녀까지 잔인하게 살해한 것으로 보아 채무 등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사건일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수사력을 모았다. 특히 일가족을 모조리 살해했다는 점에서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러나 수사팀은 금품을 노린 전형적인 강도살인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수사를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수사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수사팀이 주목한 사람은 바로 노부부의 막내아들 이충식 씨였다. 수사팀은 최근 이 씨의 동향에 대해 탐문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웃 주민들로부터 “이 씨가 얼마 전에 뜬금없이 마당에서 땅을 파는 것을 봤다”는 진술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일가족이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과 얼추 비슷한 날짜였다. 수사팀은 이 씨를 불러 조사를 시작했다.
처음에 범행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던 이충식은 수사팀이 멀쩡한 마당을 판 것 등 여러 가지 정황을 제시하며 집중적으로 추궁하자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도대체 사건 당일 이 씨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은 일가족의 사체가 발굴되기 열흘 전인 8월 13일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정께 본가의 담을 넘어 몰래 들어온 이 씨는 자신의 방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며 날을 지샜다. 그리고 다음날인 14일 새벽 5시경 2층 안방으로 가 자고 있던 아버지를 깨워 같이 1층으로 내려온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순식간에 부모를 살해한 이 씨의 범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씨는 마치 뭐에 홀린 양 망치를 집어들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1층 큰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형 이장희 씨의 머리를 망치로 때려 살해한 이 씨는 건너방으로 가서 형수(33)와 조카를 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범행 후 정신을 차린 이 씨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범행 후 밀려드는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이 씨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체를 하루 동안 그대로 방치했다. 참혹하게 널부러져 있는 사체를 보니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사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더운 날씨에 사체를 그대로 집안에 둘 수는 없었다. 또 집에 언제 누가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5구나 되는 사체를 처리하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사체를 한꺼번에 옮겨서 매장하기란 사실상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타인의 시선을 피해 사체를 집 밖으로 옮기는 것도 문제였지만 5구나 되는 사체를 매장할 만한 마땅한 장소도 없었던 것이다. 이 씨는 고심 끝에 사체를 집 앞마당에 암매장하기로 결심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범행 다음날 밤 이충식은 친구 2명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마당 배수공사를 해야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부탁한 뒤 정원을 2m 깊이로 파게 한다. 이들에게 수고비로 5만 원씩 줘서 돌려보낸 이충식은 이날 새벽 3시경 아버지의 사체를 먼저 매장한 후 나머지 사체 네 구를 차례로 매장했다. 그리고 며칠 후 집안 여기저기 튀어있는 혈흔을 감추기 위해 도배도 새로 했다.”
이 씨의 범행은 우발범행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잔혹했다. 도대체 이 씨가 연로한 부모님과 형님네 가족까지 살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사 결과 이 씨는 평소 돈 문제로 아버지와 극심한 갈등을 겪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 씨는 수년 전 용역회사에 근무하면서 노름에 빠져들었고 당시엔 상당히 큰 금액이었던 1500만 원의 빚을 지게 됐다. 20대에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이 씨가 믿을 사람은 결국 아버지뿐이었다. 이 씨는 걸핏하면 만취상태로 귀가해서 아버지에게 돈을 요구하곤 했으며 ‘이 빚을 못갚으면 죽는다’며 가족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려댔다. 이에 보다못한 이 씨의 아버지가 200만 원을 갚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씨가 범행을 저지른 직접적인 원인은 젊은 시절 진 빚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씨는 평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아버지가 자신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는 것에 상당한 불만을 품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노부부가 살던 집은 건평 100여 평으로 당시 시가 10억 원을 호가하는 건물이었다. 이충식은 평소 돈에 대해 정확하고 꼬장꼬장한 ‘구두쇠’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어오던 중 부모님이 가진 재산을 노리고 몹쓸 마음을 먹게 됐다고 털어놨다. 특히 당시 이충식은 수년 전부터 연상의 여인과 교제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목돈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는 범행 후 안방 금고에서 빼돌린 패물과 토지·가옥 문서, 수표와 현금, 통장 등을 모조리 애인에게 맡겨놨던 것으로 밝혀졌다.”
존속살인 및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씨는 법정에서 사형을 확정받았다. “아버지를 살해한 것도 모자라 범행을 숨기기 위해 어머니와 형, 형수와 조카까지 차례로 살해해 집 마당에 암매장한 것은 범행수법이 지나치게 잔혹해 극형선고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한편 당시 부모와 형제를 포함한 일가족 5명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범인이 수감된다는 소식에 해당 구치소 수감자들은 때아닌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씨는 ‘살인마’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심성이 여리고 유약한 인물이었다. 당시 이 씨와 같은 방에 수감돼 있던 한 재소자는 “장위동 일가족 살인 사건 범인이 우리 방에 들어온다고 해서 모두 공포심에 마음을 졸였다. 그야말로 이젠 다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정말 딴판이었다. 말도 않고 울다가 성경을 보다 그러고만 있어서 몹시 신경 쓰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수감 후 기독교에 귀의, 진심으로 참회의 나날을 보내던 이 씨는 1995년 11월 35세의 나이로 교수대에 올랐다. 수감 당시 서울구치소 경비교도대장으로 근무한 것을 인연으로 이 씨와 신앙적인 교류를 나눴던 박효진 장로는 “충식이는 사형집행 당일 지금까지 산 것만도 참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오히려 당시 내 아픈 다리를 걱정해줄 만큼 평온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